#1 프랑스를 대상으로 O2O 서비스를 운영하는 스타트업 대표 A씨는 최근에서야 ‘PPWR’이라는 규정을 접했다. 유럽에서 사업하고 있지만 사내에서 이 규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직원은 없었다. 디지털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라는 생각에 포장 규제와는 거리가 있다고 여겼지만 현지 사업에 상품 판매와 배송이 연결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어떤 포장이 규제 대상이고 회사가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2 유럽에 소비재를 수출하는 B사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제품 성분과 현지 인증에는 상당한 시간을 들였지만 용기와 단상자, 라벨 등 포장재 관련 자료는 별도로 관리하지 않았다. 패키지를 외부 업체에서 공급받아 포장재 상세 사양서(BOM)나 재질증명서를 확보해야 한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준비 여부와 관계없이 규정은 이미 적용되기 시작했다. EU의 ‘포장 및 포장폐기물 규정(PPWR·Packaging and Packaging Waste Regulation)’은 2025년 2월 발효된 뒤 지난 8월 12일부터 일반 적용에 들어갔다. EU 시장에 출시되는 포장재 전반을 대상으로 폐기물 감축과 재사용·재활용 확대를 요구한다.
제품 인증과 안전성에 집중해온 기업이라면 포장까지 별도의 규제 대상이 된다는 점을 놓치기 쉽다. 판매포장뿐 아니라 여러 제품을 묶는 포장과 운송포장까지 적용 범위를 살펴야 하며 전자상거래 배송에 사용하는 포장 역시 검토 대상이다. 한국에서 제품을 만들어 EU에 수출하는 기업도 판매 구조와 포장 형태에 따라 규제 적용 여부를 따져야 한다.
특히 스타트업은 제품 생산과 포장재 조달을 OEM·ODM이나 외부 공급업체에 맡기는 경우가 많아 관련 정보를 직접 보유하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제품 인증을 마치고 바이어를 확보한 뒤 마지막 단계에서 패키지를 결정하던 기업이라면 PPWR을 계기로 제품 개발 과정부터 포장과 관련 데이터를 함께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EU 포장 및 포장폐기물 규정(PPWR)은 포장재의 재활용과 재사용, 포장 최소화 등을 통해 포장 폐기물을 줄이고 순환경제 전환을 촉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AI 생성 이미지)
제품만 인증받으면 끝? 이제 포장 ‘증빙’까지 챙겨야
PPWR 대응의 출발점은 자사 제품에 어떤 포장이 사용되는지 파악하는 일이다. 소비자가 제품과 함께 받는 판매포장뿐 아니라 여러 판매 단위를 묶는 포장과 운송 과정에서 사용하는 포장까지 범위에 포함되며, 전자상거래 배송 포장도 함께 살펴야 한다. 포장재에 포함된 물질도 관리 대상으로 KTR은 관련 대응 항목으로 납·카드뮴·수은·6가크롬 등 4대 중금속과 PFAS(과불화화합물)를 제시한다. 식품접촉 포장재를 사용하는 기업이라면 PFAS 관련 기준도 별도로 챙겨야 한다.
화장품의 경우 제품 내용물의 성분과 안전성뿐 아니라 용기와 펌프, 캡, 라벨, 단상자 등 포장을 구성하는 요소와 각각의 재질까지 파악해야 하며 식품과 생활소비재, 패션 제품도 같은 방식의 점검이 필요하다. 여기서 관건은 공급망이다. 외부 패키지 업체나 OEM·ODM 기업을 이용한다면 소재와 구성 정보를 공급업체로부터 확보해야 하는 만큼 업체 선정 기준도 가격과 디자인, 최소주문수량(MOQ), 납기에서 규제 대응 자료 제공 여부까지 넓어진다.
재활용 요건도 소재 선택만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PPWR은 재활용 가능성과 함께 포장 폐기물 자체를 줄이는 방향을 담고 있으며 시험·평가를 통해 이를 입증할 객관적인 근거도 요구된다. EU 시장에서는 ‘친환경 포장을 사용했다’는 설명보다 무엇으로 만들었고 기준을 충족한다는 사실을 어떤 자료로 증명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아마존·자사몰로 직접 판다면…판매 구조부터 확인해야
스타트업이 놓치기 쉬운 또 하나는 ‘누가 규제 의무를 부담하느냐’다. EU 현지 수입사를 통해 제품을 공급하는 경우와 국내 기업이 온라인 플랫폼이나 자사몰을 이용해 EU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경우에는 책임 범위가 달라질 수 있다. PPWR은 제조업체와 수입자, 유통업체, 생산자 등 경제주체별 의무를 구분하고 있어 실제 거래 구조를 기준으로 자사의 역할을 확인해야 한다.
한국무역협회 브뤼셀지부가 정리한 EU 집행위원회 PPWR 지침문서와 FAQ에서도 제조업체와 생산자를 별도로 구분한다. EU 역외 사업자가 온라인 계약을 통해 회원국의 최종 사용자에게 포장 또는 포장된 제품을 직접 제공할 경우 생산자 범위에 포함될 수 있어 D2C 기업은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현지 수입사가 모든 규제 대응을 맡을 것이라고 보기보다 제품을 누구의 브랜드로 제조했는지, EU 시장에 공급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지 등을 따져 책임 범위를 구분해야 한다.
여기에 EPR(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 의무도 연결된다. 여러 EU 회원국의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한다면 국가별 생산자 등록 등 관련 의무를 따져봐야 하며, 현지 바이어나 유통사를 거치는 경우에도 계약 단계에서 각 주체의 책임 범위를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제품 가격과 물류, 통관 조건을 중심으로 협의하던 EU 수출 계약에 포장 규제와 EPR이라는 새로운 협상 항목이 추가된 셈이다.
‘예쁜 패키지’에서 ‘증명 가능한 패키지’로
브랜드 스타트업에는 PPWR이 패키지 디자인에도 영향을 준다. 소비재 스타트업은 브랜드 차별화를 위해 특수 소재나 코팅, 여러 겹의 포장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EU 시장을 겨냥한다면 시각적 완성도와 함께 각 구성요소의 분리와 재활용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 포장의 크기와 무게도 마찬가지다. PPWR은 포장 기능을 유지하면서 중량과 부피를 필요한 수준으로 줄이는 방향을 요구하고 있어 제품보다 지나치게 큰 박스를 사용하거나 여러 겹으로 포장하는 방식도 점검 대상이 된다.
전자상거래 기업은 제품 패키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배송 과정의 포장까지 대상이 된다. 제품 크기에 비해 큰 상자에 완충재를 채워 보내는 방식처럼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포장도 고려해야 한다. 제품을 돋보이게 하고 안전하게 배송하는 데 초점을 맞췄던 패키지 설계에 재활용성과 포장 최소화라는 조건이 추가된 것이다.
PPWR의 세부 의무가 향후 재활용 설계와 라벨링, 재생원료, 포장 최소화 등으로 단계적으로 확대된다는 점도 제품 개발 단계에서 고려해야 한다. 스타트업이 지금 개발하는 용기와 패키지는 금형 제작과 대량 발주를 거쳐 수년간 사용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후 규정에 맞춰 소재나 구조를 변경하면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따라서 지금 만드는 패키지를 몇 년 뒤에도 EU 시장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지까지 고려해야 재설계와 추가 생산에 드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국내 시험기관도 PPWR 대응 나서…진단부터 시험·기술문서까지
PPWR 시행과 함께 국내 시험·인증기관도 수출기업을 위한 대응 체계를 마련하고 있다.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KTR) PPWR 대응 서비스는 ‘EU PPWR TF’를 구성해 규제 진단부터 평가와 시험, 기술문서(TD)·적합성 선언서(DoC) 작성, 사후관리까지 연결하는 원스톱 서비스를 운영한다. 우려물질과 PFAS, 재활용 가능성, 포장 최소화, 퇴비화 가능 포장 등을 평가하며 기업에는 포장재 상세 사양서(BOM), 재질증명서, 제품사양서(TDS), 포장재 도면(CAD) 등의 준비를 안내한다.
한국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KCL) PPWR 대응 서비스도 시험·평가부터 기술문서와 적합성 선언까지 지원한다. 시험 범위는 4대 중금속과 PFAS 등 유해물질뿐 아니라 포장 최소화와 빈 공간 비율, 재생원료 품질·추적성, 재활용성 및 재활용 설계, 탄소배출량과 환경영향성 등으로 구성된다. KCL은 판매 시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1차 포장부터 멀티팩·수축필름 등의 2차 포장, 골판지 상자·파렛트·스트레치필름·완충재와 같은 3차 포장까지 적용 대상으로 안내한다.
국내 시험기관의 대응 서비스도 기업의 준비가 단순 소재 교체를 넘어 시험과 데이터, 문서 관리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외부 포장업체나 OEM·ODM을 활용하는 기업이라면 어떤 소재가 사용됐는지 확인할 수 있는 BOM과 재질증명서 등 관련 자료를 제품별로 관리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한국무역협회는 브뤼셀지부를 통해 EU 집행위원회의 PPWR 지침과 FAQ를 분석하고 국내 수출기업이 알아야 할 주요 내용을 정리했다. 포장의 정의와 적용 범위부터 경제주체별 역할 등을 다루고 있어 EU 진출 기업이 자사의 적용 여부와 책임 범위를 파악하는 데 참고할 수 있다.
EU 진출 체크리스트에 새로 들어온 ‘포장 데이터’
PPWR 대응은 현재 판매하는 제품의 포장부터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한다. 판매포장과 묶음포장, 운송포장을 구분하고 각각 어떤 소재를 사용했으며 어느 업체에서 공급받는지 파악한 뒤 BOM과 재질증명서, 제품사양서 등 관련 자료를 확보하는 순서다. D2C 기업이라면 판매 국가별 EPR 등 추가 의무도 함께 살펴야 한다.
초기 기업일수록 완제품을 만든 뒤 대응하기보다 제품 개발 과정에 규제 검토를 포함하는 편이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다. 화장품 용기나 식품 포장재를 교체하고 이미 제작한 금형과 패키지를 다시 만드는 비용은 작은 기업일수록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PPWR이 유럽 진출 기업에 던지는 질문은 ‘친환경 포장을 쓰느냐’보다 구체적이다. 무엇으로 포장했는지 알고 있는가, 이를 증명할 수 있는가, 지금 만드는 포장을 앞으로도 EU 시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가다.
제품 경쟁력과 인증, 바이어와 유통망을 중심으로 준비했던 스타트업의 유럽 진출 전략에 포장과 공급망 데이터가 새로운 변수로 들어왔다. 규정은 이미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제 차이는 PPWR을 알고 있느냐보다 자사 포장을 점검하고 필요한 자료를 확보해 얼마나 빠르게 대응하느냐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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