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벤처투자 시장은 모태펀드가 마중물을 대고 벤처캐피털이 자펀드를 결성하는 구조를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벤처투자 규모를 지속적으로 확대하려면 정부 재정과 함께 연기금·금융회사·기업 등 민간 출자자(LP)의 장기 자금이 유입돼야 한다. 그동안 민간 LP에게는 높은 투자 위험과 장기간 자금이 묶이는 부담, 성과를 비교할 기준이 부족하다는 점이 진입 장벽으로 작용했다. 정부가 출자 구조를 다양화하고 손실 부담을 낮춘 ‘LP성장펀드’를 내놓은 배경이다.
중소벤처기업부와 한국벤처투자는 지난 13일 서울 스타트업벤처캠퍼스에서 출자기관 관계자들과 ‘LP성장펀드 출범식’을 개최했다. 행사에서는 LP성장펀드의 조성 구조와 참여 기관을 공개하고, 민간자금 운용 수단으로서 벤처투자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3분기 모태펀드 정책포럼’도 진행했다.
노용석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직무대행 제1차관이 13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SVC 서울에서 열린 ‘LP성장펀드 출범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중소벤처기업부)
LP성장펀드는 연기금과 금융회사, 기업 등 다양한 출자기관이 각자의 투자 목적과 운용 조건에 맞춰 벤처투자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한 플랫폼이다. 출자자가 개별 자펀드에 참여하거나 별도의 모펀드를 통해 투자할 수 있도록 투트랙 구조를 적용한다. 우선손실충당과 풋옵션 등 위험을 낮추는 장치도 제공한다.
이번 펀드에는 총 18개 기관이 출자를 결정했다. 국민체육진흥기금과 공급망안정화기금, 한국수출입은행, KMI한국의학연구소, 극동물류그룹 등 5개 기관은 LP성장펀드를 계기로 처음 벤처투자조합 출자에 참여한다.
국민체육진흥기금과 산업재해보상보험및예방기금, 공급망안정화기금 등 3개 연기금도 출자를 확정했다. 복수의 연기금이 추가 출자를 검토하고 있으며 최종 의사결정이 완료되면 연기금 출자 규모는 지난해보다 5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에는 연기금투자풀 가운데 무역보험기금이 처음으로 벤처펀드에 참여해 200억원을 출자하고 모태펀드와 ‘LP첫걸음펀드’를 조성한 바 있다.
정부 출자 비중 낮추고 민간 자금 80%로
LP성장펀드의 핵심은 정부 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을 낮추면서 전체 펀드 규모를 키우는 데 있다. 민간 출자기관이 3400억원을 투입하면 모태펀드가 1700억원을 연계해 민관이 약 5100억원을 공동 출자한다. 이후 운용사가 추가 민간자금을 모집해 약 1조원 규모의 벤처펀드를 결성하는 구조다.
통상적인 모태펀드 출자사업에서는 정부 재정이 전체 조성액의 60% 안팎을 담당한다. LP성장펀드는 정부 재정 비중을 약 20%로 낮추고 연합 출자기관과 운용사가 모집하는 자금을 포함한 민간 출자 비중을 약 80%로 설정했다. 중기부는 이를 통해 투입 재정 대비 5배 이상의 벤처펀드 조성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조성된 자금은 방산과 인공지능, 뷰티, 바이오 등 전략산업에 투자된다. 한국수출입은행과 BNK금융그룹 컨소시엄은 1100억원 규모의 방산 특화 펀드를 조성한다. 방산 기업의 기술 개발과 성장, 수출 단계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는다.
네이버와 효성, GS, 선익시스템, 극동물류그룹, 태화그룹 등 대기업부터 중견·중소기업까지 참여하는 오픈이노베이션 펀드도 약 2500억원 규모로 결성된다. 참여 기업의 산업 네트워크와 벤처캐피털의 투자 역량을 결합해 AI와 뷰티, 바이오, 방산 스타트업의 사업 협력과 성장을 지원한다.
이어진 정책포럼에서는 민간 출자자가 벤처투자를 장기 자산배분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논의했다. 참석자들은 벤처투자 성과를 장기간 비교할 수 있는 데이터와 수익률 벤치마크, 출자기관의 내부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평가·보고 체계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출자기관과 운용사가 지속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할 수 있도록 모태펀드의 연결 기능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노용석 중기부 제1차관은 “정부는 마중물 공급자 역할에서 더 나아가 축적된 국가자본을 모험자본으로 흐르게 만드는 모태펀드 2.0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며 “LP성장펀드 출범과 포럼에서 제기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모태펀드의 차세대 벤처투자 플랫폼 역할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LP성장펀드의 첫 출자사업은 14일 공고되며 올해 4분기 안에 운용사를 선정할 예정이다. 이후 선정된 운용사가 추가 민간자금을 모집하고 분야별 자펀드를 결성하는 절차가 이어진다.
LP성장펀드의 성과는 1조원 조성 자체보다 새로 유입된 출자기관이 후속 펀드에도 반복적으로 참여하는지에 달려 있다. 손실을 완충하는 장치가 첫 출자를 이끌 수는 있지만 장기 수익률 데이터와 비교 가능한 성과지표, 표준화된 보고 체계가 갖춰져야 민간 자금이 지속적으로 유입될 수 있다. 정부가 직접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에서 시장의 자금과 운용사를 연결하고 투자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로 전환할 수 있는지가 ‘모태펀드 2.0’을 가르는 기준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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