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압을 재듯 걸음걸이를 측정하는 시대가 온다면 어떨까? 매년 병원에 가지 않아도, 집 근처 보건소나 복지관에서 1분간 걷는 것만으로 내 몸의 이상 신호를 확인할 수 있다면 말이다. 에이트스튜디오(AitStudio)의 박신기 대표는 바로 이 미래를 현실로 만들고 있다.
에이트스튜디오는 2022년 설립한 AI 보행분석 의료기기 스타트업이다. 핵심 제품 ‘메디스텝(MediStep)’은 별도 센서 없이 iPad 카메라만으로 보행 패턴을 분석하는 솔루션으로, 기존 수억 원대 장비 대비 약 90% 저렴하고 95% 이상 수준의 정확도를 구현했다. 걷는 모습을 촬영하면 AI가 전신 관절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보행 이상 신호를 찾아낸다.
에이트스튜디오 박신기 대표
보행분석 시장 가능성을 발견하다
에이트스튜디오는 처음부터 보행분석 시장을 겨냥한 회사는 아니었다. 창업 초기에는 파킨슨병 조기진단 앱을 개발했지만, 시장 규모에 한계를 느끼면서 더 큰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24년 보행분석 시장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헬스케어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된 시니어 맨발 걷기 열풍이었다. 건강을 위해 걷는 사람이 늘어나는 모습을 보며 박신기 대표는 보행 자체를 분석하는 의료기기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파킨슨병 환자를 위한 보행분석을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국내 환자 수만으로는 시장이 제한적이었죠. 그러던 중 전국적으로 시니어 맨발 걷기 열풍이 불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걸음을 관리하려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면 보행 자체를 분석하는 의료기기가 더 큰 시장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했고, 그때부터 보행분석 시장으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실제로 시니어 인구 1000만 시대에 접어들면서 보행 건강의 중요성도 함께 커지고 있다. 관절 질환자는 400만 명, 근감소증 환자는 100만 명을 넘어섰고 치매와 파킨슨병 역시 상당수가 보행 이상을 초기 증상으로 보인다. 걸음걸이가 건강 상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되는 이유다.
박 대표는 사회생활 당시 경험한 컴퓨터비전 AI 기술을 사람의 움직임 분석에 접목했고, 현재는 보행분석을 넘어 다양한 헬스케어 영역으로 기술 적용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에이트스튜디오(AitStudio)의 메디스텝(MediStep) 제품 이미지
AI로 ‘양극화’의 문제를 돌파하다
메디스텝의 기술적 본질을 묻자 박 대표는 주저 없이 ‘양극화’를 이야기했다. 기존 보행분석 시장은 수억 원대 고가 장비를 갖춘 병원이나 연구기관에서만 정밀 측정이 가능한 구조였다. 그는 AI를 통해 이 장벽을 낮추고 누구나 보행분석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기존 방식은 피험자의 몸 곳곳에 수십 개의 마커와 센서를 부착한 뒤 전용 장비가 설치된 공간에서 측정해야 했다. 시간과 비용 부담도 컸다. 반면 메디스텝은 iPad 카메라 앞에서 약 6m를 걷기만 하면 1분 이내에 보행 속도와 보폭, 균형, 무릎 및 고관절 각도 등 40개 이상의 보행 지표를 자동으로 분석한다. 온디바이스 AI를 적용해 별도의 서버나 네트워크 없이 태블릿 한 대만으로 검사가 가능하며, 이러한 기술력을 인정받아 산업통상자원부의 NET(신기술) 인증도 획득했다.
박 대표는 보행분석이 병원에서만 사용하는 전문 검사가 아니라 누구나 일상에서 건강을 확인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혈압을 재듯 정기적으로 걸음을 측정하고, 이상 신호를 조기에 발견하는 환경이 만들어질 때 비로소 보행분석의 가치가 완성된다는 생각이다.
“보행분석 시장은 혈압계 시장과 비슷한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특수한 장비처럼 여겨지지만, 앞으로는 누구나 국가건강검진을 받듯 일상에서 부담 없이 보행을 측정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부모님의 걷는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일도 머지않아 자연스러운 일상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대학병원이 먼저 찾았다”… 진입장벽 높은 의료기기 시장 돌파법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의료기기 시장은 진입장벽이 높다. 각종 인허가 절차를 통과해야 하는 것은 물론, 의료진의 신뢰를 얻기까지 오랜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신생 스타트업에게는 기술력만큼이나 신뢰를 확보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다. 그럼에도 메디스텝은 출시 8개월 만에 서울아산병원을 비롯한 국내 주요 대학병원 7곳에 도입되며 빠르게 존재감을 키웠다.
에이트스튜디오는 처음부터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임상 근거를 쌓는 전략을 선택했다. 의료진이 직접 연구에 활용하고, 그 결과가 논문과 학회를 통해 축적되면서 자연스럽게 의료 현장의 신뢰를 얻기 시작한 것이다. 의료기기 시장에서는 화려한 마케팅보다 전문가의 검증이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분당서울대학교병원 노인병내과와 근감소증 스크리닝 관련 임상 연구를 진행하는 등 학술적 레퍼런스도 꾸준히 넓혀가고 있다.
대학병원에서 확보한 신뢰는 다시 공공 영역으로 이어졌다. 메디스텝은 서울시 약자동행 네트워크를 통해 성동구와 강남구 복지관에서 활용되고 있으며, 전국 보건소와 복지관, 시니어 운동센터 등으로도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상급 의료기관에서 기술력을 검증받고, 그 신뢰를 기반으로 지역사회까지 활용 범위를 넓혀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지난 ‘2026 넥스트라이즈’ 행사에 참가한 에이트스튜디오 부스 현장 이미지
글로벌 기업들과의 협업 통해 근감소증 해외 시장 공략하다
에이트스튜디오가 주목하는 핵심 시장은 근감소증이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근감소증은 의료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질환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고, 단순히 근육량을 측정하는 것을 넘어 실제 신체 기능을 얼마나 유지하고 있는지 함께 평가하는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이와 함께 보행분석의 역할 역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이 같은 변화에 맞춰 에이트스튜디오는 글로벌 헬스케어 기업과 협력해 근육량 측정 기술과 메디스텝의 AI 보행분석 기술을 결합하고 있다. 근육의 양뿐 아니라 보행이라는 ‘수행 능력’까지 함께 분석해 근감소증을 보다 입체적으로 평가하는 솔루션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이러한 기술 경쟁력을 바탕으로 해외 시장 진출도 속도를 내고 있다. 올해 상반기 아시아 4개국 수출을 시작했으며, 오는 9월에는 독일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에 참여해 현지 연구기관과 병원 관계자들을 만날 예정이다. 지난해 스위스 시장 진출에 이어 독일을 비롯한 유럽 시장으로 협력 범위를 확대하며 시니어 보행분석 분야의 글로벌 레퍼런스도 차근차근 쌓아가고 있다.
박 대표는 고령화 시대에 AI가 의료진의 ‘보조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환자는 급증하는데 의료 인력은 한정된 현실에서, AI가 그 간극을 메울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령자는 계속 늘어나는데 의사분들이 물리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건 제한적입니다. 모든 환자를 수시로 볼 수는 없으니까요. 의사의 눈을 보조할 수 있는 게 바로 AI 기술이고, AI가 지속적으로 환자를 모니터링해주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의사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의사가 더 중요한 판단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거죠.”
걸음걸이 하나로 질병을 읽어내는 기술. 파킨슨병 조기진단 앱에서 출발해 헬스케어 산업으로 나아가고 있는 에이트스튜디오가 글로벌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에 어떤 발자국을 남기게 될 지 주목된다.
* 스타트업 생태계 기자단은 KAIA와 벤처스퀘어가 함께 운영하며 스타트업 현장의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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