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어느 때보다 촘촘하게 연결돼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깊은 분열을 경험하고 있다. 전쟁과 분쟁은 장기화되고, 강대국 간 경쟁은 정치와 경제, 기술, 안보 전반으로 확산되며 국제질서를 흔들고 있다.
공급망과 에너지, 식량은 더 이상 경제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국가 안보의 핵심 의제로 떠올랐다.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기술 역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동시에 윤리와 규범, 디지털 격차라는 새로운 과제를 던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협력은 여전히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다시 설계돼야 하는가.
25일 해비치 호텔&리조트 제주에서 열린 제21회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 개회식. 올해 포럼은 ‘분열의 시대, 협력의 재구상(Reinventing Cooperation in a Fragmented World)’을 주제로 26일까지 열린다.
9,856+ 참가자·31+ 참여국가·48+ 참여기관·187+ 세션…역대급 규모로 열린 제주포럼
제21회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이 25일 제주 해비치 호텔&리조트에서 개회식과 세계지도자세션을 열고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올해 포럼의 대주제는 ‘분열의 시대, 협력의 재구상(Reinventing Cooperation in a Fragmented World)’이다. 이번 포럼에는 9,856명 이상의 참가자와 31개국 이상, 48개 이상의 기관이 참여했으며, 총 187개 이상의 세션이 진행되는 등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제주포럼은 2001년 출범 이후 한반도와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논의하는 공공 외교 플랫폼으로 성장해 왔다. 올해는 제주가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지 21주년을 맞는 해이자, 제주포럼이 외교부와 처음으로 공동 개최되는 해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해졌다.
오영훈 제주특별자치도지사가 제주포럼 개회식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개회사에서 오영훈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지난 21년간 제주가 걸어온 평화의 여정은 이제 더 넓은 협력의 무대로 나아가고 있다”며 “올해 제주포럼은 외교부와 처음으로 공동 개최되며 국가와 지방, 국제사회를 연결하는 대한민국 대표 평화 플랫폼으로 한 단계 더 성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국제질서를 “촘촘히 연결돼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깊은 분열을 경험하는 시대”라고 진단했다. 이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방식을 반복하는 형식적인 협력이 아니라, 국경과 이념, 세대와 지역을 넘어 공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협력의 틀”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오 지사는 “더 실용적이고, 더 포용적인 연대. 그것이 바로 올해 제주포럼이 말하고자 하는 분열의 시대, 협력의 재구상”이라며 “세계가 분열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면 제주는 협력의 시대를 열겠다. 세계가 갈등의 언어에 익숙해진다면 제주는 공존의 언어를 먼저 말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제주포럼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검버자브 잔당샤타르 전 몽골 총리, 필리프 뢰슬러 전 독일 부총리 등 세계 지도자들을 초청했다. 차기 유엔 사무총장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주요 인사들도 제주를 찾아 다자주의와 국제협력의 미래를 논의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제21회 제주포럼 세계지도자세션에서 “어떤 국가도 혼자 살아갈 수 없다”며 기후위기 대응과 국제협력, 다자주의 회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세계지도자세션…무너지는 질서 속 협력의 재설계
세계지도자세션의 화두는 분명했다. 무너지는 다자주의, 강대국 경쟁, 기후위기, AI와 기술 윤리, 중견국의 역할이었다. 모더레이터를 맡은 가렛 에반스 전 호주 외교장관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단순히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가장 생산적인 전략이 무엇인지 묻고자 한다”며 논의를 열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가장 큰 우려로 기후위기, 강대국 간 경쟁, 유엔과 국제기구의 약화를 꼽았다. 그는 “기후변화는 한두 개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며 “파리기후협약은 중요한 성과였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은 미국과 중국, 러시아, 유럽연합 등 주요 강대국 간 대화가 약화되고 있는 현실도 우려했다. 그는 “주요 강대국들이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며 “우리 후손의 미래와 지구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세상 어떤 국가도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협력해야 하고, 형제와 자매, 이웃 국가로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유엔의 역할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냈다. 그는 “국제기구의 힘이 약화되고 있는 상황이 매우 걱정스럽다”며 “미국은 국제기구로 돌아와야 한다. 세계는 여전히 미국을 중요한 리더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치 지도자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세계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강대국 경쟁 속에서 중견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강대국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게임의 규칙을 만들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약소국과 중견국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며 “국제법과 유엔 헌장을 지키는 질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기후위기와 빈곤, 팬데믹, 대규모 전쟁과 같은 글로벌 의제는 어느 한 국가가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다자주의가 약화되면 이러한 문제에 대응할 방법도 약해진다”며 “한국, 일본, 호주, 인도네시아와 같은 중견국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고 균형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왼쪽부터) 제21회 제주포럼 세계지도자세션에 참석한 가렛 에반스 전 호주 외교장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검버자브 잔당샤타르 전 몽골 총리, 필리프 뢰슬러 전 독일 부총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스타트업 협력과 동아시아 연결의 가능성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우애(友愛)’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협력의 의미를 풀었다. 그는 “자신의 존엄과 자유를 존중하는 동시에 타자의 존엄과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우애”라며 “우애는 개인 사이뿐 아니라 지역과 국가 사이에서도 성립되는 이념”이라고 말했다. 그는 동아시아 협력의 가능성을 강조하며 청년과 시민, 스타트업의 교류 확대를 제안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동아시아 공동체는 하루아침에 실현될 수 없지만, 대화와 상호 이해, 협력의 틀을 꾸준히 만들어가야 한다”며 “청년들이 함께 배우고, 교환학생으로 만나고, 스타트업 협업을 통해 서로를 신뢰하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협력의 감각은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남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강조했다. 이는 국가 간 외교를 넘어 청년, 시민사회, 기업, 스타트업이 새로운 협력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었다.
검버자브 잔당샤타르 전 몽골 총리는 제주와 몽골의 역사적 인연을 언급하며 “제주에서 분열된 세계를 다시 연결하는 방법을 논의하는 것은 매우 뜻깊다”고 말했다. 그는 기후위기, 공급망 위기, 기술 발전, 국가 간 신뢰 약화를 복합 위기로 지적하면서 “전통적 다자주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글로벌 합의가 마비될 때는 더 유연한 협력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리프 뢰슬러 전 독일 부총리는 자국 우선주의가 확산되는 현실을 언급하며 “국익을 우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회복탄력성과 고립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가 독립성을 갖는 것과 세계와 단절되는 것은 다르다며, 글로벌 도전 과제 앞에서는 협력이 현실적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세션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단어는 ‘중견국’, ‘시민’, ‘청년’, ‘신뢰’였다. 강대국 중심 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중견국들이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주장과, 국가 간 합의가 어려울수록 도시와 지역, 대학과 기업, 시민사회가 협력의 새 통로가 돼야 한다는 메시지가 이어졌다.
제주포럼이 던진 질문도 여기에 있다. 협력은 정상회담과 국제기구의 의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청년의 교류, 스타트업의 공동 프로젝트, 지역 간 네트워크, 기술과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실천적 협업까지 확장될 때 협력은 다시 현실의 언어가 된다.
올해 제주포럼은 분열의 시대를 진단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분열이 깊어질수록 협력의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과거의 다자주의가 국가 중심의 협의체였다면, 앞으로의 협력은 중견국과 지방정부, 기업과 스타트업, 청년과 시민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다층적 구조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크다.
오영훈 지사의 말처럼 세계가 갈등의 언어에 익숙해지고 있다면, 제주는 공존의 언어를 먼저 말하려 하고 있다. 그 언어가 국제정치의 선언에 머물지 않고, 청년과 스타트업, 지역과 세계를 잇는 실제 협력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가 앞으로의 과제다.
제주포럼이 다시 던진 질문은 분명하다. 분열의 시대에도 협력은 가능한가. 이날 제주에서 나온 답은 “가능하다”에 가까웠다. 다만 그 협력은 과거의 방식이 아니라, 더 유연하고 더 실용적이며 더 많은 주체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다시 설계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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