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창업도시에는 기술 발굴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좋은 기술을 찾아 초기 창업을 지원하는 것에 더해 자본과 시장을 연결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내는 역량까지 요구된다. 세계 창업생태계 순위 9위에 오른 서울도 다음 목표를 ‘기업의 성장’에 맞췄다. AI와 딥테크를 중심으로 기술 실증부터 투자, 사업화, 해외 진출까지 연결해 서울에서 탄생한 스타트업을 세계 시장으로 보내겠다는 계획이다.
서울시와 매경미디어가 공동 주최하고 서울경제진흥원(SBA)이 주관한 글로벌 스타트업 축제 ‘Try Everything 2026’이 지난 9일부터 10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이틀간의 일정을 마쳤다. 올해 주제는 ‘AI Changes Everything, Now Try Everything’이다. 국내외 스타트업과 투자자, 대·중견기업, 대학·연구기관 등 창업생태계 구성원들이 모여 AI가 바꾸는 산업과 새로운 사업 기회를 논의했다. 공식 프로그램은 DDP 아트홀 1·2관과 컨퍼런스홀에서 글로벌 콘퍼런스와 IR 피칭, 오픈이노베이션, 일대일 밋업, 전시, 네트워킹 등으로 구성됐다.
서울시는 올해 피지컬 AI와 로봇 등 국내외 스타트업 80개사의 혁신 기술을 현장에 선보였으며 글로벌 VC와 대기업을 연결하는 일대일 밋업을 통해 투자유치와 사업 협력, 해외 진출 기회를 함께 모색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Try Everything 2026 개막식에서 서울의 AI·딥테크 스타트업 육성과 글로벌 스케일업 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세계 9위 서울, 이제 ‘스타트업을 세계로 보내는 도시’로
개막식에 참석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AI가 산업과 일상의 변화를 넘어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단계로 진입했다며 창업가와 투자자, 기업, 대학·연구기관을 연결하는 생태계의 중요성을 앞세웠다.
오 시장은 “AI는 이미 산업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의 일과 생활을 바꾸고 있다”며 “이제 중요한 것은 변화를 예측하는 데 그치지 않고 누가 먼저 도전해서 새로운 시장을 만드느냐”라고 말했다.
서울의 창업생태계는 글로벌 평가에서도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서울은 세계 약 300개 도시를 대상으로 한 글로벌 창업도시 평가에서 3년 연속 톱10을 기록했고 올해 순위는 9위다. 오 시장은 지난 7년간 서울 창업생태계 가치가 1,000억 달러 이상 성장하고 5만 개 이상의 고부가가치 일자리가 만들어졌다는 성과도 함께 언급했다.
서울이 다음 성장축으로 꺼낸 카드는 AI·딥테크와 글로벌 스케일업, 개방형 창업생태계다. 양재 AI, 홍릉 바이오, 수서 로봇 등 미래산업 거점을 중심으로 연구개발과 기술 실증, 사업화를 연결하고 대학과 연구기관의 원천기술이 스타트업을 거쳐 기업과 공공 현장에서 검증받도록 지원한다. 기술을 발굴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실제 시장에 진입하는 과정까지 서울의 산업 거점 안에서 촘촘하게 연결하겠다는 방향이다.
기술이 시장으로 나가는 과정에는 자본도 따라붙는다. 서울시는 2019년부터 총 7조 원 규모의 벤처펀드를 조성해 스타트업 투자를 지원해왔고, 2027년부터 4조 원 규모의 ‘넥스트 이코노미 서울 펀드’를 새롭게 조성한다. AI와 K-컬처 등 미래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동시에 해외 투자자 및 창업지원기관과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서울에서 출발한 기업이 초기부터 글로벌 시장을 겨냥할 수 있는 기반을 넓힌다.
서울시는 스타트업이 기술과 자본을 확보한 뒤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민간의 역할도 강조했다. 투자자와 대·중견기업, 대학·연구기관이 스타트업과 더 자주 만나 기술을 검증하고 협업할 수 있도록 접점을 만들고, 창업가의 상상력과 도전을 가로막는 규제와 불필요한 절차도 덜어낸다. 한 번의 실패가 창업의 끝이 되지 않도록 재도전을 뒷받침하는 생태계 조성도 세부 과제로 제시했다.
오 시장은 이 과정에서 민간을 창업생태계의 주인공으로 꼽으며 “스타트업이 과감하게 도전하고 투자자가 가능성을 발견하고 기업과 대학이 힘을 보탤 때 혁신이 탄생한다”고 말했다. 이어 서울을 “혁신이 시작되는 도시를 넘어 혁신을 키워 세계로 내보내는 도시”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에릭 브리뇰프슨 스탠퍼드대 교수가 Try Everything 2026에서 ‘기업들의 AI 생산성 증대 가속 전략’을 주제로 기조강연 무대에 올랐다.
AI 성능은 뛰어난데 생산성은 왜 더디게 오를까
올해 행사의 중심에 AI를 배치한 만큼 개막 직후 기조강연은 AI의 성능보다 그 기술이 실제 생산성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질문을 던졌다. 세계적인 디지털 경제 연구자인 에릭 브리뇰프슨 스탠퍼드대 교수의 강연 주제는 ‘기업들의 AI 생산성 증대 가속 전략’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앞선 기술을 손에 쥔 지금이 기업가정신을 키우고 새로운 회사를 세우기에 좋은 시기라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갔다.
출발점은 200여 년 전 산업혁명이었다. 증기기관이 인간의 근육이 하던 일을 기계로 옮기면서 생산과 생활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면, 오늘날 AI는 지식과 판단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범용 기술에 해당한다. 시각 인식과 언어 이해, 수학 등 여러 분야에서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앞서는 지점은 빠르게 늘어나는 반면 기업과 경제 전체의 생산성은 기술 발전의 속도를 그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브리뇰프슨이 ‘AI 생산성 역설’로 짚은 간극이다.
더 좋은 AI를 도입하는 것만으로 생산성 격차를 해소하기는 어려웠다. 새로운 기술을 기존 업무에 덧붙이는 방식으로는 생산성을 큰 폭으로 높이기 어렵고, 비즈니스 프로세스와 조직의 역할, 일하는 방식까지 함께 재설계해야 한다는 게 강연의 핵심이었다. 기술 투자와 조직 혁신, 새로운 업무 프로세스, 기업가정신이 맞물려야 AI의 성능이 기업의 생산성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논리다.
기술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데 조직과 제도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브리뇰프슨은 바로 그 간극에서 창업의 기회를 찾았다. 이미 존재하는 업무를 AI로 조금 더 빠르게 처리하는 것보다 기술을 전제로 새로운 기업과 업무 방식을 설계하는 창업가에게 지금의 변화가 더 큰 기회를 열 수 있다는 관점이다.
Try Everything 2026에서 서울시와 금융투자협회가 공동 개최한 ‘스케일업센터 공개 IR 결선 피칭’에 참가한 스타트업이 투자자와 심사위원을 대상으로 사업모델과 기술을 발표하고 있다.
강연에서 끝내지 않고 투자·실증·글로벌 진출로
행사장에서는 이 같은 논의를 실제 비즈니스 기회로 연결하는 프로그램이 이틀 동안 이어졌다. 스타트업과 투자자·대기업을 연결하는 일대일 현장 밋업에서는 사전 매칭을 거친 기업들이 투자와 협업 가능성을 논의했고, 올해 밋업 전용 부스는 지난해 15개에서 30개로 확대됐다.
오픈이노베이션도 주요 축을 차지했다. 서울경제진흥원과 마크앤컴퍼니가 공동 주관한 ‘서울 오픈이노베이션 인사이트 데이’에는 아모레퍼시픽, CJ ENM, 인바디, 현대홈쇼핑, CJ제일제당, 삼성전자 등이 참여해 스타트업 발굴 기준과 협업 경험을 공유했다. 스타트업이 대기업의 인프라를 활용해 사업모델을 검증하고 실제 파트너십으로 연결하는 과정까지 다뤘다.
글로벌 진출을 겨냥한 프로그램도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미국 등 여러 시장으로 이어졌다. 한국 스타트업과 해외 스타트업이 서로의 시장 진입 전략을 발표하는 글로벌 스타트업 익스체인지부터 글로벌 VC 네트워킹, 해외 현지 진출 세션 등이 함께 열렸다. 피지컬 AI와 방산·딥테크, 프런티어 AI, 오픈이노베이션처럼 올해 스타트업 시장에서 빠르게 부상한 주제들도 무대에 올랐다. 프로그램북에는 팔란티어 FDE 세션과 앤트로픽의 아시아·태평양 AI 스타트업 성장 전략, 피지컬 AI의 양산 문제를 다룬 세션 등이 포함됐다.
Try Everything 2026 전시장에 마련된 글로벌존에서 해외 기관과 기업들이 국내 스타트업과 교류하며 글로벌 진출과 협력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올해 Try Everything이 던진 질문은 AI 기술 자체의 가능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을 누가 먼저 사업으로 만들고, 투자와 실증을 거쳐 세계 시장까지 가져갈 수 있느냐가 창업 경쟁의 새로운 기준으로 떠올랐다. 이틀 동안 DDP에 모인 스타트업과 투자자, 기업, 대학·연구기관의 만남도 기술을 실제 사업과 시장으로 연결하는 데 집중됐다.
오 시장이 개막식에서 꺼낸 “혁신을 키워 세계로 내보내는 도시”라는 표현은 서울이 그리고 있는 창업생태계의 방향을 압축한다. 좋은 기술을 발견하는 것에서 기업을 키우고 세계 시장에 안착시키는 것까지, 서울이 풀어야 할 과제도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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