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제품은 더 많이 팔렸지만, 소비자가 지갑을 연 금액은 오히려 줄었다. 고가의 IT 기기와 대형 가전의 판매가 주춤한 사이 소형 주방가전과 기존 제품을 유지·보수하는 데 필요한 부품의 판매는 증가했다. 구매 방식도 한층 신중해졌다. 제품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여러 쇼핑몰과 브랜드를 비교하는 데 수주일을 투자하고, 인공지능(AI)을 정보 탐색에 활용하면서도 최종 판단은 직접 내리는 소비자가 적지 않다. 판매량 증가와 매출 감소가 동시에 나타난 국내 가전시장의 이면에는 제품 선택부터 정보 탐색, 구매 결정에 이르기까지 달라진 소비 행태를 볼 수 있다.
글로벌 커머스 플랫폼 크리테오가 8일 발표한 ‘2026 가전 및 전자제품 소비 트렌드(Consumer Electronics Pulse 2026)’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국내 주요 제휴 커머스 사이트의 가전·전자제품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3% 증가했다. 구매 전환율도 7% 상승했다. 반면 사이트 방문 트래픽은 4% 감소했고 평균 주문 금액은 9%, 전체 매출은 6% 줄었다.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는 늘었지만 한 번에 지출하는 금액은 줄어든 것이다. 크리테오는 소비자들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제품과 소형 가전, 기존 기기의 유지·보수에 필요한 부품으로 구매를 이동한 결과로 분석했다. 다만 이 수치는 크리테오의 데이터 수집 대상인 주요 커머스 파트너와 사이트의 거래 실적을 비교한 것으로, 국내 가전시장 전체의 매출 증감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2026년 2분기 국내 가전·전자제품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3% 증가했지만, 평균 주문 금액은 9%, 전체 매출은 6% 감소했다. (자료 제공: 크리테오)
품목별 판매량에서도 변화가 확인된다. 1구 휴대용 인덕션은 전년 동기 대비 42%, 믹서기·블렌더는 37% 증가했다. 4구 빌트인 인덕션도 15% 늘었다. 전자제품을 연결하거나 수리하는 데 사용하는 AV 케이블과 커넥터 판매량 역시 각각 34%, 22% 증가했다.
반면 데스크톱 컴퓨터 판매량은 49% 감소했고 프로젝터와 토스터·그릴은 각각 44% 줄었다. TV는 26%, 태블릿은 24% 감소했다. 주방에서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가전과 기존 기기의 활용도를 높이는 부품이 상대적으로 선전한 반면, 일부 고가 IT 기기와 엔터테인먼트 제품의 판매는 부진했던 것이다.
2026년 2분기 국내 가전·전자제품 카테고리별 판매량 변화. 1구 휴대용 인덕션과 블렌더 등 주방가전은 증가한 반면, 데스크톱 컴퓨터와 TV 등 일부 IT·영상기기는 감소했다. (자료 제공: 크리테오)
이 같은 현상은 해외 시장과도 차이를 보인다. 같은 기간 미주 지역의 가전·전자제품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2% 증가했고 평균 주문 금액도 9% 상승했다. 유럽·중동·아프리카(EMEA) 지역 역시 매출이 8%, 평균 주문 금액이 4% 증가했다. 아시아·태평양(APAC) 지역의 매출과 평균 주문 금액은 큰 변화가 없었다. 한국은 비교 대상 지역 가운데 판매량이 증가하면서도 평균 주문 금액과 매출이 모두 감소하는 특징을 나타냈다.
구매까지 2주 이상 46%…검색하고 비교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소비자들의 신중한 구매 성향은 제품 탐색 기간에서도 확인된다. 크리테오가 2026년 6월 진행한 소비자 설문조사에서 한국의 가전·전자제품 구매자 가운데 첫 온라인 검색 이후 구매까지 2주 이상 걸린다는 응답은 46%로 나타났다. 글로벌 평균인 39%보다 7%포인트 높은 수준이다. 한국 소비자 중 1주일 이상 구매를 고민하는 비율은 77%였으며, 검색 당일 구매를 마치는 비율은 5%에 그쳤다.
가전제품은 패션이나 뷰티 제품과 비교해 구매 결정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품목이었다. 소비자들이 가격뿐 아니라 성능, 에너지 효율, 사용 후기, 브랜드별 사양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 가전·전자제품 소비자의 37%는 구매 전에 4개 이상의 웹사이트나 정보 출처를 확인한다고 답했다. 글로벌 평균 35%보다 높은 수치다. 반대로 하나의 출처만 참고한다는 응답은 국내 9%, 글로벌 12%였다.
여러 채널을 오가는 구매 방식도 탐색 기간과 관련이 있었다. 글로벌 커머스 데이터에서 앱과 웹을 모두 이용한 구매 여정은 평균 32일이 걸렸다. 이들은 평균 2.7개 브랜드에서 10개 제품을 살펴봤다. 웹만 이용한 소비자가 평균 1.9개 브랜드에서 6개 제품을 확인한 것과 차이가 났다. 다만 이는 채널을 많이 이용할수록 구매 기간이 길어진다는 연관성을 보여주는 자료로, 앱 이용 자체가 구매 지연의 원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온·오프라인을 함께 고려하는 구매 방식 역시 중요해졌다. 국내 소비자의 온라인 마켓플레이스 이용률은 62%였으며, 브랜드 공식 웹사이트와 브랜드 직영 매장 이용률은 각각 31%로 조사됐다. 브랜드 입장에서는 특정 쇼핑몰에 상품을 노출하는 것만으로 소비자의 구매 결정을 이끌기 어려워진 환경이다. 소비자가 검색부터 비교, 체험, 구매에 이르기까지 여러 접점을 거치는 만큼 제품 정보의 일관성과 실제 사용 경험을 전달하는 방식이 중요해지고 있다.
AI로 찾지만 직접 고른다…가전 구매의 새로운 탐색 경로
AI는 이러한 구매 과정에 새로운 변수로 등장했다. 국내 가전·전자제품 구매자의 53%는 구매 과정의 일부에서 AI 챗봇이나 AI 어시스턴트를 활용했다고 답했다. 글로벌 평균 48%보다 5%포인트 높은 비율이다.
AI는 제품의 기능을 설명하거나 여러 모델의 차이를 비교하는 데 활용된다. 소비자는 제품명을 일일이 검색하는 대신 자신의 예산과 사용 목적, 필요한 기능을 입력해 구매 후보를 추릴 수 있다. 크리테오의 글로벌 데이터에서는 2026년 상반기 챗GPT를 통해 상품 상세 페이지로 유입된 비중이 전통적인 검색 유입 비중의 약 2배에 달한 것으로 분석됐다. 가전·IT 분야의 크리테오 고객사 대부분에서는 매월 최소 한 건 이상의 챗GPT 경유 구매도 관측됐다.
그러나 AI 활용이 곧 추천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뜻하지는 않았다. AI를 이용하는 국내 소비자의 58%는 AI가 추천하거나 소개한 제품이 구매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응답했다. 글로벌 평균 61%보다는 다소 낮았다.
제품을 고르는 방식에 대한 질문에서도 직접 비교하려는 성향이 확인됐다. 국내 소비자의 41%는 전체 제품군을 직접 살펴보고 원하는 조건에 따라 필터링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개인화된 제품 추천을 선호한다는 응답은 28%, 전문가가 선별한 제품 목록을 선호한다는 응답은 23%였다.
AI가 정보 탐색의 출발점으로 활용되더라도 소비자는 여러 제품의 사양과 가격을 확인하며 구매 결정권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가전 제조사와 유통기업에는 AI가 읽고 비교할 수 있는 정확한 상품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소비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비교 기능과 상세한 설명을 갖추는 일이 중요해졌다.
11월 11일이 모두의 대목은 아니다…제품별로 다른 구매 시계
구매 시점에서도 기존의 쇼핑 공식과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크리테오가 2025년 4분기 국내 커머스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가전·전자제품 전체의 일별 온라인 매출은 11월 3일에 10월 기준 기간 대비 39% 증가하며 주요 관측 시점 중 가장 높은 상승폭을 기록했다.
개별 제품으로 범위를 좁히면 차이는 더욱 커졌다. 정수기와 정수 필터의 온라인 매출은 11월 11일 기준 기간 대비 485% 증가했다. 가습기는 11월 3일 426%, 건조기는 11월 1일 269%, 멀티탭과 서지 보호기는 11월 10일 259%의 상승폭을 나타냈다.
2025년 4분기 국내 가전·전자제품의 품목별 온라인 매출 추이. 정수기·정수 필터는 11월 11일, 가습기는 11월 3일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는 등 제품별 구매 집중 시점에 차이가 나타났다. (자료 제공: 크리테오)
이는 모든 가전제품의 수요가 하나의 대형 할인 행사에 집중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정수 필터처럼 교체 수요가 존재하는 제품과 계절적 필요가 큰 가습기, 구매 단가가 높은 대형 가전은 소비자가 구매를 결정하는 시점과 프로모션에 반응하는 방식이 서로 다를 수 있다. 다만 해당 증가율은 2025년 10월 첫 4주간의 온라인 매출을 기준으로 산출한 것으로, 전년 동기 대비 성장률과는 다르다.
지역별 차이도 뚜렷했다. 2025년 블랙프라이데이 기간 미주와 EMEA 지역의 소비자 가전 판매량은 10월 기준 기간 대비 각각 168%, 158% 증가했다. APAC 지역에서는 11월 11일 쇼핑 이벤트에 판매량이 74% 증가했고, 12월 12일에도 56% 상승했다. 국내 시장에서는 글로벌 쇼핑 이벤트 자체보다 제품별 수요와 국내 유통 환경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크리테오 코리아 김도윤 대표는 “국내 가전 및 전자제품 구매자들은 더욱 신중해지고 있는 동시에 그들의 구매 여정 또한 훨씬 다변화되고 있다”며 “소비자는 리테일러와 채널 전반에 걸쳐 제품을 비교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 경험을 넘나들며, 제품을 탐색하고 평가하기 위해 AI를 적극 활용하면서도 최종 선택은 직접 내리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번 보고서는 가전시장의 변화를 판매량이나 할인율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졌다는 점을 드러낸다. 어떤 제품을 구매하는지뿐 아니라 구매를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탐색하는지, AI와 오프라인 매장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는지, 제품별 수요가 언제 집중되는지가 함께 중요해지고 있다. 제조사와 유통기업의 경쟁도 소비자의 구매 순간을 확보하는 것에서 장기간의 탐색과 비교 과정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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