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찰은 결국 가격 싸움 아닌가요? 얼마를 쓸지만 잘 정하면 되는 거죠?”
인수를 준비하는 대표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가격을 정하는 일은 입찰의 절반에 불과하다. 나머지 절반의 승부는 입찰서를 내기 직전, 마지막 5분에 있다. 나는 과거의 입찰 현장에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배웠다.
입찰서 한 장의 함정, “빈 양식을 챙겨라”
과거 회생 절차를 밟던 한 리조트 회사를 인수하려던 때였다. 예비 실사를 모두 마쳤고, 드디어 입찰서를 내는 날이 밝았다. 회사의 최종 보고를 거쳐 확정된 매입 가격은 151억 원. 숫자가 적힌 입찰서 한 장을 챙겨 부산으로 떠나려는데 직속 상사가 물었다.
“준호 씨, 입찰서 하나만 준비했어요?”
“네, 그렇습니다. 151억 원으로 승인받았으니까요.”
“그러면 안 됩니다. 입찰장에서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금액만 비워 둔 입찰서를 여러 장 가져갑시다.”
가격이 이미 정해졌는데 왜 빈 양식이 여러 장 필요한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 시키는 대로 빈 서류를 챙겼다.
입찰 마감은 오후 5시였다. 우리는 오후 3시쯤 매각주간사인 회계법인에 도착했다. 경쟁자가 어디인지, 분위기는 어떤지 슬쩍 물었지만 담당자는 “결과로 말씀드리겠다”며 철저히 말을 아꼈다.
나는 곧바로 입찰서를 내고 홀가분하게 기다릴 줄 알았다. 그런데 상사는 “5시 전에만 내면 되죠?”라고 묻더니 매각주간사 측에 비어 있는 사무실을 하나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마감 직전까지 다른 입찰자들의 움직임을 살피고, 상황이 바뀌면 즉각 대응하려는 심산이었다.
회의실 문을 닫자 상사가 말했다.
“141억, 151억, 161억. 세 장 다 만듭시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141억 원짜리 입찰서부터 작성하고 있었다. 그때 주간사 상무가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감이 5분쯤 남았다는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 책상 위의 입찰서를 미처 가릴 틈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내가 쓰고 있던 ‘141’이라는 숫자에 머무는가 싶더니, 입가에 미소가 살짝 번졌다.
기업 인수 입찰을 앞두고 준비한 141억·151억·161억 원의 세 가지 선택지를 표현한 이미지. 협상에서는 하나의 가격에 매달리기보다 상황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출처: AI 생성형 이미지)
151억 원의 안전함과 141억 원의 책임
그가 나가자마자 내가 본 것을 다급히 말했다. 상사 역시 같은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 미소는 ‘그 정도 금액이면 승산이 있다’는 무언의 신호로 읽혔다.
회사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금액은 151억 원이다. 그 금액을 써서 떨어지면 우리에게 책임은 없다. 반면 현장에서 임의로 가격을 낮춰 141억 원을 썼다가 떨어지면 그 모든 책임은 온전히 M&A 실무팀의 몫이 된다.
짧은 침묵 끝에 상사가 말했다.
“141억으로 갑시다. 책임은 내가 집니다.”
놀랐지만 나 역시 그 찰나의 미소를 봤기에 141억 원이 적힌 입찰서를 냈다. 제출 직후에도 상사는 노련했다. 오늘 당장 결과를 알려 달라고 압박했다. 보통은 다음 날 발표하니 돌아가라는 만류에도 우리는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만약 몇억 원 차이로 떨어지더라도 현장을 지키며 그 자리에서 어떻게든 수습하고 재협상을 끌어내려는 배수진이었다. 나는 입찰서를 내고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상사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협상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전화가 울렸다. 우리가 우선협상대상자, 즉 본계약을 먼저 협상할 권리를 얻은 인수 후보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이었다.
협상의 준비는 ‘정답’이 아니라 ‘선택지’를 만드는 일
결과만 보면 151억 원이 아닌 141억 원으로 선정되었으니 10억 원을 아낀 셈이다. 그렇다고 그 판단이 옳았다고 단정하지는 못한다. 스쳐 간 미소 하나가 완벽한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141억 원으로 떨어졌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끝났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만약 내 서류 가방에 151억 원짜리 입찰서 딱 한 장만 들어 있었다면 그날 우리는 ‘선택’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란 사실이다.
마감 5분 전의 미세한 정보 앞에서 과감하게 가격을 고를 수 있었던 건 세 장의 선택지를 들고 갔고, 끝까지 서류를 내지 않은 채 기다렸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의 투자유치나 계약 협상도 마찬가지다. 협상 테이블의 정보는 마감 직전까지 생물처럼 움직인다. 가격이나 조건을 하나의 ‘정답’으로 정해두고 가지 말자. 여러 개의 시나리오와 카드를 준비해야 한다.
‘상대가 어떤 신호를 보이면 낮은 안을 낼지, 어떤 신호를 보이면 높은 안을 낼지’를 미리 정하고, 그 판단의 책임을 누가 질 것인지도 합의해 두어야 한다. 그래야 현장에서 판을 바꿀 수 있다.
덧붙이자면, 협상장 책상 위의 서류는 뒤집어 두는 편이 좋다.

우준호 대표는 이랜드에서 15년간 M&A와 전략, 사업 운영, 투자를 경험하며 국내외 15건, 누적 약 13억 달러 규모의 인수·매각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현재 M&A·투자유치 전문 자문사 우앤파트너스 대표로 기업의 거래 검토부터 협상과 실행까지 지원하고 있다. 드라마 〈협상의 기술〉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알려졌으며, 실제 M&A 현장에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과 스타트업의 협상 전략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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