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이 다른 근로자들이 함께 일하는 산업현장에서 언어는 작업의 효율과 안전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건설현장의 안전교육이나 선박 내 작업 지시처럼 여러 사람이 동시에 정보를 공유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서로 다른 언어로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가운데 필요한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고, 작업 과정에서 생성되는 기록과 데이터도 기업의 중요한 정보로 관리해야 한다.
부산에 본사를 둔 엔디소프트는 이러한 현장에 다자간 실시간 인공지능(AI) 통역 기술을 적용하고 있다. 최대 500명이 하나의 통역 세션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이용자들은 각자 선택한 언어로 통역된 음성과 문자를 스마트폰에서 확인한다. 여러 사람이 발언권을 얻어 대화에 참여할 수 있고, 동시에 발생하는 음성도 구분해 처리하도록 설계했다. 국제회의와 행사에서 시작한 서비스는 이제 제조업과 건설현장, 선박, 대학과 공공시설 등으로 활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이 기술을 개발한 박남도 대표의 출발점은 통역이 아닌 기업용 문자 서비스였다. 2008년 사업을 시작한 그는 금융기관과 공공기관, 대학 등을 대상으로 대량의 문자 데이터를 처리하는 통신 서비스를 운영해 왔다. 18년간 쌓아온 기술과 경험은 다수의 음성을 실시간으로 처리하는 새로운 사업의 기반이 됐다. 엔디소프트는 기존 메시징 사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AI 통역을 또 하나의 수익사업으로 성장시키고 있다.
대량 문자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통신 기술의 새로운 쓰임
엔디소프트의 사업은 기업용 메시징에서 시작됐다. 금융기관이나 공공기관이 고객에게 보내는 알림과 안내 문자를 대량으로 처리하는 서비스다. 박 대표는 2008년 사업을 시작해 2012년 법인으로 전환했고, 이후 기업과 기관을 대상으로 통신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그의 이력에는 스타크래프트 맵핵 제작과 해킹 경험, 2021년 세계지식포럼 인공지능 분야 연사 활동도 포함돼 있다. 프로그래밍과 통신 기술을 다뤄온 경험은 오랫동안 기업용 메시징 서비스를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이어졌다.
기업용 문자 서비스에서 중요한 것은 많은 데이터를 안정적으로 처리하는 능력이다. 금융기관이나 공공기관의 안내 문자는 특정 시점에 전송량이 집중되기도 한다. 수많은 메시지를 지연이나 누락이 발생하지 않도록 처리하려면 통신량을 분산하고 데이터 전송 과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엔디소프트는 이러한 분야에서 장기간 고객 관계를 유지해 왔다. 회사에 따르면 메시징 고객의 90%가 10년 이상 거래를 이어오고 있으며, 자동화된 시스템을 통해 전담 인력 3명이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2025년 전체 매출 345억 원 가운데 메시징 부문 매출은 292억 원으로 약 85%를 차지한다.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기존 통신 서비스가 주요 수익 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엔디소프트 박남도 대표>
박 대표가 다음 사업으로 눈을 돌린 것은 실시간 음성 통신이었다. 대량의 문자 데이터를 처리해 온 경험을 여러 사람의 음성을 동시에 전달하고 통역하는 기술에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기존의 순차적인 스트리밍 통역 방식에서는 다수 이용자의 음성이 겹치거나 접속량이 증가할 때 처리 지연과 음성 분리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엔디소프트는 이러한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메시징 사업에서 활용해 온 에이전트-게이트웨이(Agent–Gateway) 방식을 통역 시스템에 적용했다. 여러 화자의 음성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하면서 속도를 높이고 데이터 손실을 줄이는 데 중점을 둔 구조다.
문자와 음성은 데이터의 형태가 다르지만, 많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랫동안 축적한 통신 인프라 운영 경험이 새로운 기술을 구현하는 데 활용된 셈이다.
2019년 AI 통역 기술 연구개발에 착수한 엔디소프트는 2021년 서비스를 선보였다. 국제회의와 행사에서 기술을 적용하며 실제 이용 환경에서의 작동 가능성을 확인했고, 2023년부터는 기업과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유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박 대표가 통신 기술을 공공 분야에 활용해 온 경험도 이러한 사업 전환과 맞닿아 있다. 엔디소프트는 2011년부터 지방자치단체에 재난문자 관련 기술을 개발해 무상 지원했으며, 2013년부터는 범죄 예방을 위한 안심벨 기술을 제공했다. 2022년부터는 협회와 단체, 초등학교 등에 다자간 실시간 통역 서비스를 무상으로 지원하고 있다.
재난 상황에서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고, 범죄 예방을 위해 위험 상황을 알리던 기술이 이제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사소통을 돕는 데 쓰이고 있다. 기술을 적용하는 대상과 환경은 달라졌지만, 필요한 정보를 제때 전달해 사람들의 불편과 위험을 줄인다는 점에서는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서로 다른 언어를 하나의 대화로, 다자간 실시간 통역의 구현
엔디소프트의 AI 통역 서비스 ‘레디세이(Ready Say)’는 이용자가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통역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발언자의 음성이 인식되면 다른 참가자들은 각자 선택한 언어로 변환된 음성과 문자를 확인한다. 여러 사람이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화자를 구분하고 통역 결과를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박 대표가 개발 과정에서 중점을 둔 것은 다수의 이용자가 접속한 환경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하면서 사용 방법은 간편한 서비스를 만드는 일이었다. 산업현장이나 공공시설에서는 사용하는 언어가 다양하고 이용자가 수시로 바뀐다. 별도의 전문 통역 장비를 갖추거나 복잡한 설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 일상적인 업무에 적용하기 어렵다.
엔디소프트는 이러한 이용 환경에 맞춰 서비스를 ‘Language Free Zone’, ‘Language Free City’, ‘Language Free Shop’으로 구분했다. 같은 통역 기술을 기반으로 하면서 장소와 목적에 따라 접속 방식을 달리한 것이다.
‘Language Free Zone’은 공공시설과 산업현장처럼 일정한 공간에서 통역이 반복적으로 필요한 곳을 위한 서비스다. 전용 패널이 설치된 지역의 반경 30m 안에 들어오면 통역 세션에 자동으로 접속하도록 설계해 이용 절차를 간소화했다. 2026년 10월 업데이트를 통해 웹 접속도 가능하도록 했으며, 컨퍼런스와 초등학교, 협회·단체 등을 대상으로 무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고정된 공간을 벗어나 이동 중에도 통역할 수 있도록 개발한 서비스는 ‘Language Free City’다. 이용자들이 휴대전화를 두 번 가볍게 맞부딪치는 ‘톡톡’ 동작으로 통역을 시작하는 방식이다. 대화 내용을 저장하거나 내려받을 수 있어 산업현장에서는 안전교육 이력과 작업 지시를 관리하고, 기업에서는 회의록을 작성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관광지와 상점 등에서는 ‘Language Free Shop’을 적용한다. 방문객이 상점 입구에 설치된 패널에 휴대전화를 두 번 접촉하면 매장 직원들과 통역 세션이 연결된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고객과 직원이 하나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구조다.
세 서비스는 공간과 사용 방식에서 차이가 있지만, 여러 사람이 각자의 언어로 소통한다는 목적을 공유한다. 엔디소프트는 이를 구현하기 위해 다자간 실시간 음성인식과 음성출력, 화자 분리, 대규모언어모델(LLM), 사용자 인터페이스 등 통역 서비스의 주요 기술을 자체 개발했다고 설명한다. 회사가 강조하는 기술적 강점은 외부 통역 API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통역에 필요한 핵심 기술을 독자적으로 운영한다는 점이다.
기업과 기관의 업무에 통역 기술을 적용하면서는 정보 보안도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안전교육 내용과 작업 지시, 회의 기록 등에는 외부에 공개하기 어려운 기업 정보가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엔디소프트는 이러한 데이터가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통역 처리와 기록 관리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경쟁력으로 내세우고 있다.
다양한 언어를 지원하는 기능뿐 아니라 여러 이용자가 동시에 참여할 수 있는 통신 구조, 간편한 접속 방식, 업무 기록의 관리까지 하나의 서비스로 연결한 것이다. 박 대표가 기업용 메시징 사업에서 축적한 대용량 통신 처리 기술은 이러한 다자간 통역 시스템의 기반이 되고 있다.
국제행사에서 산업현장으로, 일상에 스며드는 통역 기술
엔디소프트가 AI 통역 서비스의 현장 적용 경험을 쌓은 곳은 국제행사였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제주포럼, 플라이 아시아, 부산 블록체인 위크 등 다양한 국가의 참가자가 모이는 행사에서 통역 서비스를 제공했다. 언어와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동시에 참여하는 환경에서 기술을 운영하며 서비스의 활용 가능성을 확인했다.
2023년 10월에는 조달청 벤처창업혁신조달상품으로 지정되면서 공공시장에 진출할 기반도 마련했다. 국제행사에서 확보한 운영 경험은 이후 기업과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공급하는 과정에 활용됐다.
최근에는 행사 기간에 일시적으로 필요한 통역보다 일상적인 업무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통역에 사업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가 참여하는 제조업체와 건설현장, 다양한 국적의 선원이 함께 생활하는 선박 등이 주요 대상이다.
이들 현장에서는 안전교육과 작업 지시,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통역의 정확성과 속도가 작업 효율은 물론 안전과도 연결되는 만큼, 여러 사람이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수요가 존재한다.
서비스 이용 지표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나타났다. 엔디소프트에 따르면 AI 통역 서비스의 계속 이용률은 2024년 53.3%에서 2025년 79.3%로 높아졌다. 평균 계약 기간도 2023년 3.8개월에서 2025년 18.2개월로 늘었다. 국제행사를 중심으로 시작한 서비스가 기업과 기관의 장기 이용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매출에서도 사업화 성과가 확인된다. 2025년 AI 통역 사업 매출은 53억 원으로 전체 매출의 약 15%를 차지했다. 2019년 연구개발을 시작한 뒤 2021년 서비스를 출시하고 유료사업으로 전환한 지 수년 만에 독립적인 수익 기반을 확보한 것이다.
고객을 확보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개별 기업과 계약하는 동시에 산업별 협회와 단체를 통해 회원사에 서비스를 공급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2026년 2월에는 이노비즈협회 부산울산지회와 산업·안전 분야 업무협약을 체결했으며, 같은 해 5월에는 전국해상선원노동조합연맹과 계약을 맺고 외국인 선원이 근무하는 회원 선사로 서비스 공급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선박은 다양한 국적의 선원들이 좁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고 근무하는 환경이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선원들에게 같은 작업 내용을 전달해야 하고, 긴급 상황에서는 신속한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엔디소프트는 이러한 산업별 특성에 맞춰 다자간 통역 서비스를 적용하고 있다.
국내에서 축적한 경험을 해외시장으로 확대하기 위한 준비도 이어지고 있다. 싱가포르와 태국, 중동 등 아시아태평양 및 인접 지역을 주요 진출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회사가 제시한 현황에 따르면 해외 17개국 기업과 25건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앞으로는 이러한 협력 관계를 실제 서비스 공급 계약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과제다.
국내에서는 부산을 중심으로 ‘Language Free City’ 사업도 협의 중이다. 외국인 주민과 관광객이 일상생활에서 통역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공공시설과 도시 생활공간으로 적용 범위를 넓히려는 구상이다. 산업현장의 업무용 통역에서 출발해 도시의 일상적인 의사소통을 지원하는 서비스로 발전시키겠다는 계획이다.
박 대표가 18년간 운영해 온 기업용 메시징 사업과 새롭게 성장시키고 있는 AI 통역 사업은 서로 다른 시장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수많은 정보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전달하는 통신 기술이 자리하고 있다. 문자 데이터를 처리하던 기술은 사람의 목소리를 인식하고 서로 다른 언어로 전달하는 기술로 확장됐고, 국제행사에서 시작한 서비스는 산업현장과 공공시설로 활용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앞으로 엔디소프트가 풀어야 할 과제는 국내에서 확보한 장기 이용 고객과 산업별 협력 기반을 해외시장으로 연결하는 일이다. 다양한 현장에서 통역의 정확성과 안정성을 높이고, 업무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서비스로 자리 잡아야 한다.
재난문자와 안심벨, 기업용 메시징을 거쳐 다자간 실시간 통역에 이르기까지 박 대표가 개발해 온 기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과거에는 수많은 사람에게 문자 한 통을 안정적으로 전송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새로운 목표가 됐다. 엔디소프트가 축적한 통신 기술은 그렇게 또 다른 소통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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