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VC 180곳에 콜드메일을 보냈다. 90곳에서 답이 왔고, 40곳과 첫 미팅을 했다. 답장률 50%는 콜드 아웃리치에서 나쁘지 않은 숫자였다. 투자 조건을 정리한 텀시트(Term Sheet)는 단 한 장도 받지 못했다. 처음에는 마흔 개의 서로 다른 실패라고 생각했다. 미국 VC마다 취향이 다르니, 하나씩 다르게 준비하면 된다고 믿었다. 틀렸다. 마흔 번의 미팅을 모아 놓고 보니 서른일곱 번이 같은 질문에서 끝나 있었다.
첫 질문에 우리는 회사 소개로 답했다
미팅은 대개 이렇게 시작됐다.
“우리가 왜 귀사에 투자해야 합니까?”
우리는 준비한 대로 답했다. 무슨 회사인지, 기술이 어떻게 다른지, 시장이 얼마나 큰지, 어떤 고객이 있는지. 상대가 원한 것은 회사 소개가 아니라 투자 논리였다. 회사 소개는 “우리는 이런 회사입니다”로 끝난다. 투자 논리는 “그래서 당신의 돈이 이렇게 불어납니다”로 끝난다. 나는 앞의 것을 마흔 번 반복했다.
미팅을 끝낸 질문은 따로 있었다. 투자설명자료인 피치덱(Pitch Deck)을 다 넘기고 미팅 분위기도 괜찮아졌다고 느꼈을 때, 질문이 하나 나왔다
“우리가 투자하면 몇 배로 엑시트(Exit·투자금 회수)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나는 “10배 정도로 봅니다”라고 답했다. 상대가 물었다.
“어떤 근거로요? 어느 회사가 어느 매출에 어느 멀티플(Multiple·매출 대비 기업가치 배수)로 인수한다는 가정입니까?”
나는 말이 막혔고, 관련 사례를 확인해서 다시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상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적대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뒤로 기술에 대한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말한 10배라는 숫자에는 구체적인 계산이나 근거가 없었다. 우리 회사의 누구도 투자금이 어떤 조건에서 10배로 회수될 수 있는지 따져본 적이 없었다. 기술과 시장, 고객에 대해서는 철저히 준비했지만 정작 투자자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투자자는 단순히 수익률을 물은 것이 아니라 그 숫자가 만들어지는 경로를 물었다. 우리는 한국의 비상장 법인이었고, 투자자가 넣은 돈이 어떤 경로로 몇 년 뒤 몇 배가 되어 그의 펀드로 돌아가는지를 나는 한 번도 그려 본 적이 없었다. 기술도 시장도 고객도 설명할 수 있었지만, 투자금 회수는 설명하지 못했다.
계산해 보면 10배는 사업계획이 된다
지금이라면 이렇게 계산한다. 숫자는 가정이다. 투자자가 기업가치(밸류에이션) 500억 원을 기준으로 50억 원을 투자해 지분 10%를 확보했다고 하자. 이후 추가 투자유치 과정에서 기존 투자자의 지분율이 낮아지는 지분 희석을 거쳐, 최종 투자금 회수(Exit) 시점에는 6%를 보유하게 됐다고 가정해 보자. 처음 투자한 50억 원을 10배로 만들려면 500억 원을 회수해야 한다. 지분 6%로 500억 원을 가져가려면 회사는 약 8,300억 원 이상에 팔려야 한다.
그러면 질문이 바뀐다. 우리 회사가 정말 8,000억 원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가. 누가, 왜, 매출의 몇 배에 해당하는 가격으로 우리 회사를 인수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이 있어야 ‘10배’라는 숫자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된다.
“구글이 인수할 수 있습니다”라는 설명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투자설명자료에 글로벌 기업의 로고를 넣는 일은 쉽다. 그러나 그 기업의 어느 사업부가, 어떤 예산으로, 우리의 어떤 기술을 사서 무슨 문제를 해결하려는지 설명하는 일은 어렵다. 인수자는 회사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문제를 돈을 주고 없앤다. 인수 후보 기업 열 곳을 적고 각각 왜 인수할지, 왜 인수하지 않을지를 한 줄씩 써 보면 회사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첫 번째 벽을 넘으면 다음 벽이 나온다
그 질문을 막힘없이 넘긴 미팅은 거의 없었지만, 넘어간 곳에서는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법인 구조는 적절한지, 설명한 내용을 자료로 증명할 수 있는지, 기존 주주와 합의 가능한 가격인지에 관한 질문이었다. 네 개의 벽이 정해진 순서로 있었고, 앞의 벽에 부딪혀야 다음 벽이 보였다.
첫 번째 벽은 투자금 회수(Exit)였다. 우리는 투자자를 설득하는 발표인 피치(Pitch)가 부족한지를 고민했지만, 실제로 투자자가 물은 것은 투자한 돈이 어떤 경로로 몇 배가 되어 돌아올 수 있는지였다. 두 번째는 법인 구조였다. 미국 법인만 만들면 되는지를 고민했던 우리와 달리 투자자는 실제로 투자하고 회수할 수 있는 법적·사업적 구조인지를 확인하려 했다.
세 번째는 투자 실사(Due Diligence)였다. 우리는 좋은 사업 설명만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투자자는 우리가 설명한 기술과 사업 성과를 계약서, 재무자료 등 문서와 숫자로 증명할 수 있는지 물었다. 마지막은 기업가치 평가를 뜻하는 밸류에이션(Valuation)이었다. 우리는 기업가치를 얼마나 높게 인정받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지만, 투자자가 확인하려던 것은 기존 주주와 신규 투자자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가격인지였다.
법인 구조에서는 값비싼 교훈도 있었다. 한 투자자가 “미국 회사가 아니면 투자할 수 없다”고 했고, 우리는 미국 델라웨어주에 주식회사 형태의 법인을 설립해 기존 한국 회사의 지배구조를 전환하는 플립(Flip)을 두 달간 검토했다. 미국 투자유치에 자주 활용되는 델라웨어 C-Corp 형태로 전환하는 방안이었는데, 직접 비용 견적만 약 2억7,000만 원이었다. 나중에 그 투자자에게 플립을 완료하면 투자가 확정되는지 물었더니 답은 “적극 검토하겠다”였다. 그가 한 말은 투자 검토를 위한 조건이었지 투자하겠다는 약속이 아니었다. 우리는 결국 플립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 질문은 두 달 뒤가 아니라 첫 미팅에서 했어야 했다.
다시 간다면 순서를 뒤집는다
지금이라면 VC 리스트를 가장 마지막에 연다. 먼저 실제로 돈을 낸 미국 고객이 있는지, 그 고객이 단위 경제로 환산되는지를 본다. 그다음 투자자가 돈을 회수하는 경로를 계산하고, 그 경로가 요구하는 법인 구조를 정한다. 자료를 남이 열기 전에 스스로 열어 보고, 기존 주주가 감당할 바닥과 다음 라운드가 받아 줄 천장 사이에서 밸류에이션 범위를 잡는다. 이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180곳이 아니라 20곳의 리스트를 만든다.
미국 VC 미팅을 앞둔 창업자에게 하나만 권한다면 이것이다. 첫 미팅 전에 “투자자의 돈이 어떤 경로로 몇 배가 되어 돌아오는가”를 한 장의 계산으로 만들어 보라. 계산이 막히는 지점이 곧 지금 우리 회사의 가장 약한 고리이고, 그 자리에서 투자자의 질문도 멈춘다.
질문이 멈췄다는 것은 우리를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라, 더 알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것을 마흔 번 겪고서야 알았다.
Venture Insider | 20년 이상 글로벌 마케팅과 사업개발, 해외 영업, 투자유치(IR) 분야에서 활동해 왔다. AI·딥테크 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과 미국 투자유치를 직접 이끌며 해외 사업 현장에서 다양한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Venture Insider의 글로벌 생존기’를 통해 미국 VC 투자유치부터 해외 시장 개척, 글로벌 비즈니스 협상까지 현장에서 부딪히며 얻은 경험과 실질적인 교훈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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