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로코, 팀블라인드, 인프런, 코스닥 상장사 노을 등 국내외 스타트업을 자문하고 셀렉트스타, 차트메트릭, 굿타임 등에 엔젤투자를 해온 한기용 업젠(Upzen) 대표는 인공지능(AI) 시대에 기술만으로 경쟁 우위를 오래 지키기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제품을 만드는 비용과 시간이 크게 줄었고, 어렵게 개발한 기능도 몇 달 뒤 글로벌 거대언어모델(LLM)의 기본 기능으로 들어가거나 경쟁사가 빠르게 따라올 수 있어서다.
한기용 업젠 대표
한 대표가 극초기 스타트업을 평가할 때 기술만큼 중요하게 보는 것도 ‘오래 버틸 생각’과 ‘불확실성을 대하는 태도’다. 창업은 한 번의 아이디어나 기술로 승부가 결정되는 일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방향을 찾아가는 긴 과정이라는 경험에서 나온 기준이다.
“제가 창업자를 볼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오래 버틸 생각을 하고 있는지와 불확실성을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인지입니다. 창업에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고 시간이 걸리며,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실패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창업자가 있는 팀에서는 의견 충돌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도 살핀다. 지분이 비슷하더라도 각자의 역할과 의사결정 범위가 분명해야 하고, 서로 다른 의견이 나왔을 때 갈등을 피하기보다 건강하게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AI가 기술 개발의 속도를 끌어올리면서 이런 조직의 대응력은 더 중요해졌다. 한 대표는 오늘 어렵게 만든 AI 기능이 6개월 뒤에는 거대언어모델의 기본 기능으로 제공되거나 경쟁사에 의해 빠르게 복제될 수 있는 환경에서는 기술 자체를 영구적인 진입장벽으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스타트업이 빠지는 대표적인 기술부채는 대충 만든 코드보다 미래를 너무 앞서 준비하느라 만든 ‘불필요한 코드’, 즉 오버엔지니어링(Over-engineering)에서 나옵니다. 또 코스닥 상장사나 오랜 연구를 거친 연구개발(R&D)팀일수록 ‘우리가 깎아온 20년 기술을 AI가 쉽게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관련 분야 인턴을 뽑아 AI만으로 기존 기술을 복제해보는 시도 등을 통해 바깥의 변화를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기술의 복제 속도가 빨라질수록 경쟁자가 단기간에 따라오기 어려운 자산은 오히려 기술 바깥에서 만들어진다. 한 대표는 오랜 시간 축적한 도메인 데이터와 고객의 실제 업무 흐름에 깊게 들어간 제품, 규제로 인해 생기는 진입장벽, 현장에서 고객과 관계를 쌓아온 영업 역량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2017년 엔젤투자한 음악 데이터 플랫폼 차트메트릭(Chartmetric)이 그중 하나다.
“기술 자체가 평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음악 산업 데이터를 오랜 기간 수집하고 정리해 업계 실무자들이 실제 의사결정에 사용하는 형태로 다듬어낸 구조는 경쟁자가 모델 하나를 잘 만든다고 하루아침에 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기업 간 거래(B2B) 영업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본다. 좋은 기술과 가격을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고객이 실제로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듣고, 다음 만남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경쟁력이 쌓인다는 것이다.
“B2B 영업은 30분 만에 기술과 가격을 일방적으로 쏟아붓는 프레젠테이션이 아닙니다. 고객의 진짜 어려움이 무엇인지 묻고 들으며 다음 미팅을 이어가는 신뢰 구축 과정이어야 계약이 완성됩니다.”
기술보다 복제하기 어려운 것, 시간이 갈수록 높아지는 ‘인재밀도’
한 대표가 투자하거나 자문한 기업 가운데 인수합병(M&A)이나 기업공개(IPO)까지 성장한 회사에서는 또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회사가 성장할수록 조직 안에서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의 비중, 이른바 ‘인재밀도’가 높아졌다는 점이다.
초기 멤버가 계속 같은 역할을 맡는 것보다 회사의 성장 속도에 맞춰 구성원도 함께 성장해야 하고, 필요한 시점에는 기존 팀보다 경험이 많은 인재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표가 채용뿐 아니라 피드백과 역할 조정, 조직문화까지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한 대표의 생각이다.
“잘 되는 회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팀의 인재밀도가 좋아지는 형태로 발전합니다. 이는 창업자나 대표가 인적자원관리(HR)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저절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인정에 사로잡혀 조직을 망치지 않고, 성장을 멈춘 초기 멤버에게 빠르게 피드백을 전달해 변화를 유도해야 합니다. 태도가 부정적인 오래된 구성원이 있다면 최악의 경우 잘 헤어질 방법까지 찾아야 합니다.”
그가 직접 경험한 온라인 교육 플랫폼 유데미(Udemy)도 사례로 들었다. 초기에는 미국 내 기반이 부족했던 창업자 에렌 발리(Eren Bali)와 옥타이 차글라르(Oktay Caglar)가 대학 후배를 중심으로 팀을 꾸렸지만, 제품시장적합성(PMF)을 확인하고 빠르게 성장하면서 자신들보다 경험이 많은 엔지니어를 지속적으로 영입했다.
“초기 미국 내 기반이 없어 대학 후배들 위주로 팀을 구성했지만, 제품시장적합성을 찾고 고속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들보다 훨씬 경험 많고 똑똑한 엔지니어들을 계속 채용했습니다. 일의 결과를 내는 사람이 인정받고 질문과 실수가 수용되는 심리적 안전감도 만들어졌고요.”
반대로 아이디어 자체의 우수성에 기대 사업모델 전환 시기를 놓치거나, 초기 구성원이 회사의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조직 전체의 인재밀도도 낮아질 수 있다. AI로 기술 개발 속도가 빨라진 상황에서는 좋은 아이디어를 먼저 내놓는 것보다 변화에 맞춰 사람과 조직을 계속 성장시키는 역량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얘기다.
한기용 업젠 대표 (출처: 업젠 제공)
미국 진출도 한 번의 승부보다 짧은 학습을 반복한다
한국 스타트업의 미국 진출에서도 한 대표는 같은 ‘학습 능력’을 강조한다. K2G 펀드의 유한책임조합원(LP)이자 한국과 미국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멘토로 활동해온 그는 창업자의 의지만으로 해외 진출을 밀어붙이는 방식을 경계한다. 창업자와 한국에 남은 팀이 현지에서 무엇을 확인하고 있는지 충분히 공유하지 못하면 의사소통 비용과 자본 부담이 함께 커질 수 있어서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4주 동안 체류하며 이번에 끝장을 보겠다’는 비장함으로 오는 창업자들입니다. 4주 동안 계약이나 투자 유치가 안 나오면 ‘실패했다’고 단정 짓고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미국 시장에 대해 비로소 첫 배움을 얻은 것입니다.”
처음부터 미국에 조직을 만들기보다 창업자와 핵심 인력이 반복적으로 현지를 방문하면서 고객을 만나고 가설을 수정하는 방식을 권한다. 방문 기간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기에 한 번씩 약 2주 동안 머물며 고객 조사를 진행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제품과 전략에 반영한 뒤 다시 현지에서 확인하는 식이다.
“체류비나 항공권보다 더 큰 비용은 창업자가 자리를 비운 한 달 동안 한국 팀이 현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공백으로 남겨지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사람을 채용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비용은 한국의 3~4배에 달합니다. 충분히 배우기 전에 조직부터 옮기기보다 창업자와 핵심 인력이 반복해서 오가며 시장을 배우고 관계를 쌓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한 번의 출장에서 계약이나 투자라는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현지에서 얻은 정보를 다음 실행에 반영하는 것이 핵심이다. 한 대표에게 미국 진출은 한 번의 대형 승부보다 시장을 이해하는 짧은 학습을 여러 번 반복하는 과정에 가깝다.
한기용 대표의 저서 <실패는 나침판이다> 표지 이미지 (출처: 업젠 제공)
창업자와 CEO는 같은 사람이지만 같은 역할은 아니다
회사가 성장하면 창업자 자신도 변해야 한다. 한 대표는 미국에서 근무했던 7개 스타트업 가운데 5곳에서 창업자가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교체되는 과정을 경험했으며, 이 가운데 4곳이 이후 기업공개나 인수합병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창업자와 CEO라는 두 역할의 구분이다. 회사를 처음 만든 사람이라는 정체성과 현재 회사가 필요로 하는 경영자의 역할을 동일하게 볼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창업자는 회사를 만든 정체성이지만 CEO는 그 시점에 회사가 필요로 하는 역할입니다. 미국 이사회는 회사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대표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면 외부 경영진을 데려오거나 CEO를 교체합니다. 야후에 인수된 폴리보어(Polyvore)의 창업자 파샤 사드리(Pasha Sadri)는 여성 패션이라는 도메인 한계를 느끼자 충성 고객이었던 구글 제품관리자(PM) 출신 제스 리(Jess Lee)를 설득해 공동창업자로 영입하고 대표 자리를 자발적으로 내줬습니다. 대표가 회사의 가장 큰 자산일 수도 있지만 본인의 성장 속도가 느려지면 가장 큰 병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개발자에서 리더와 투자자, 교육자로 역할을 바꿔온 한 대표 역시 자신의 경험을 ‘실패하지 않는 방법’보다 실패한 뒤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다시 움직일 것인가에 가깝게 설명한다. 강한 동기부여를 계속 유지하려 하기보다 작은 행동을 반복할 수 있는 습관을 만드는 것을 장기적으로 성장하는 방법으로 꼽는다.
그의 저서 『실패는 나침판이다』에도 이런 생각이 담겼다. 일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을 때 실패 자체에 오래 머무르기보다 무엇을 배웠는지 돌아보고 다음 선택에 반영하는 태도다.
기술이 빠르게 복제되고 시장의 변화 속도도 빨라진 AI 시대에는 처음부터 완벽한 기술과 정답을 가지고 출발하기 어렵다. 한 대표가 창업자에게 ‘오래 버틸 생각’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먼저 묻는 것도 그래서다. 기술이 달라지면 제품을 바꾸고, 시장이 다르면 다시 배우며, 회사가 성장하면 사람과 리더의 역할까지 바꿀 수 있는 조직. 한 대표가 말하는 스타트업의 해자는 결국 변화보다 빠르게 배우고 움직이는 능력에 있다.
* 스타트업 생태계 기자단은 KAIA와 벤처스퀘어가 함께 운영하며 스타트업 현장의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The post “AI 시대 기술적 해자는 없다”… 한기용 업젠 대표가 말하는 스타트업의 새로운 해자 공식 appeared first on 벤처스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