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한 편을 만드는 데 70억원이 필요하다면 자본이 부족한 작은 스튜디오는 꿈을 접어야 할까. 홍정민 스튜디오 여우별 대표는 제작비를 마련하는 것만큼이나 제작 방식 자체를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2017년부터 준비한 장편 사극 애니메이션 ‘비운의 명장 흑치상지’를 극장에 걸기 위해서는 당시 추산으로 최소 70억원 이상이 필요했지만, 파일럿 영상을 완성한 뒤에도 본편 제작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개발해온 작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언리얼 엔진을 활용해 제작 방식을 바꾸기 시작한 홍 대표는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눈을 돌렸고, 이제는 기존 제작비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않는 20억원 이하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완성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단순히 제작비를 낮추려는 시도라기보다 작은 스튜디오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장편으로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도전이다.
최근에는 AI로 제작한 90초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스티칭 하트(Stitching Hearts)’가 국제 무대에서 성과를 냈다. 2026 ILLUMINATE Oneness of Humanity Micro-Shorts Competition에서 최종 후보 15편에 선정된 데 이어 Honorable Mention을 수상한 것이다. 주최 측에 따르면 이번 대회에는 세계 67개국에서 648편이 출품됐다.
홍 대표가 작품을 기획하고 완성하기까지 걸린 기간은 사흘, 실제 제작에 투입한 시간은 약 10시간이었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AI 영상 생성 모델 씨댄스(Seedance 2.0)와 음악 생성 도구 수노(Suno)를 활용했지만, 그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제작 속도보다 짧은 이야기 안에서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는 일이었다.
스튜디오 여우별은 현재 AI 기반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을 연구하는 한편, 자체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한 숏폼 콘텐츠를 선보이며 새로운 제작·유통 방식을 실험하고 있다. 지난 15일 홍 대표의 작업실에서 그가 AI를 선택한 이유와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을 향한 계획을 들었다.
AI 단편 애니메이션 연출과 캐릭터 기획을 선보이고 있는 홍정민 감독
사흘 만에 만든 90초 애니메이션, 67개국 작품과 경쟁하다
‘스티칭 하트’는 추억이 깃든 단추를 잃어버리고 쓸쓸해하던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받은 단추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기억을 떠올리고 상실의 아픔을 위로받는 이야기다. 홍 대표는 1분 30초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인물의 감정과 관계를 전달하기 위해 장면의 흐름과 결말에 집중했다.
작품을 제작하는 데 AI 도구를 활용했지만, 시나리오와 이야기의 구조를 결정하는 일은 직접 맡았다. 어떤 장면을 보여줘야 관객이 캐릭터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어디에서 끝내야 여운이 남을지 고민하는 과정은 기존 애니메이션 제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AI로 영상을 만드는 것 자체는 예전보다 훨씬 쉬워졌습니다. 하지만 어떤 장면을 보여줘야 관객이 캐릭터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어떻게 끝내야 여운이 남을지는 여전히 고민해야 합니다.”
그는 AI로 얼마나 빠르고 화려한 영상을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보다 작품을 본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가 중요하다고 봤다. 이번 수상 역시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작품이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았다는 점과 함께, 사람의 온기와 공감을 담으려 했던 이야기가 해외 관객에게도 전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홍 대표가 애니메이션을 처음 꿈꾼 계기도 기술보다는 이야기에 있었다. 연극과 연출을 공부하던 스물한 살 무렵 팀 버튼 감독의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본 뒤 캐릭터가 연기하고 노래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뮤지컬 애니메이션에 매료됐다. 배우의 움직임과 감정 표현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후 대학원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했고, 스톱모션 광고와 단편 애니메이션, TV 애니메이션 파일럿 등을 제작하며 경험을 쌓았다.
뮤지컬 애니메이션 ‘덕혜, 마지막 황녀’를 제작했으며 영화와 드라마 제작 현장에도 참여했다. 영화 ‘승리호’,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DOTA: 용의 피’, 드라마 ‘방과후 전쟁활동’ 등의 제작 과정에서 일했고, ‘스위트홈 시즌2’와 ‘힘쎈여자 강남순’ 등에서는 3D 프리비즈(Previsualization) 작업을 수행했다. 프리비즈는 본격적인 촬영이나 제작에 앞서 장면 구성과 카메라 움직임을 미리 영상으로 구현하는 과정으로, 홍 대표에게는 이후 AI 영상 제작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경험이 됐다.
홍정민 감독이 제작 및 연출한 주요 단편 애니메이션 포스터. (왼쪽부터) Mew & Bow, Stitching Hearts, 숨비 고래
70억원의 제작비 앞에서 AI를 선택한 이유
홍 대표가 2024년 스튜디오 여우별을 설립한 것은 자신이 개발한 이야기를 직접 작품으로 완성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른 제작사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경험을 쌓았지만,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려면 별도의 기반이 필요했다.
그가 2017년부터 개발해온 작품은 장편 사극 애니메이션 ‘비운의 명장 흑치상지’다. 같은 해 충남스토리텔링 공모전에서 동상을 받았으며, 2024년에는 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기획창작스튜디오 지원을 받아 언리얼 엔진으로 파일럿 영상을 제작했다. 그러나 파일럿을 완성한 뒤 극장용 장편으로 확장하기 위한 제작비를 검토하면서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혔다. 당시 홍 대표가 추산한 최소 제작비는 70억원 이상이었다.
“이야기와 캐릭터를 개발하고 파일럿까지 만들었는데 실제 장편으로 제작하려면 엄청난 자금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꼭 이만큼의 돈이 있어야만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을까. 제작 방식 자체를 바꿔보면 어떨까.”
그때부터 생성형 AI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기 때문에 활용해보겠다는 접근보다는 이미 개발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제작 방법을 찾는 과정에 가까웠다. 기존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에서 인력과 시간이 많이 투입되는 공정을 살펴보고, AI를 적용할 수 있는 단계와 여전히 사람의 판단이 필요한 영역을 구분해 나갔다.
흥미로운 점은 AI를 연구하면서 오히려 시나리오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는 것이다. 홍 대표는 2024년 한국시나리오연구소(KSI)에서 1년 동안 전문 과정을 수강하며 캐릭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법과 시나리오 구조를 다시 익혔다. 이미지를 만들고 영상을 생성하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결정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재도 작품을 제작할 때는 먼저 로그라인을 쓰고 시놉시스를 정리한 뒤 캐릭터를 설계한다. 그다음 이야기와 장면에 필요한 AI 도구를 선택하며, 영상을 먼저 생성한 뒤 그 결과에 맞춰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은 지양하고 있다.
홍 대표는 AI 영상 제작에도 기존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연출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캐릭터가 특정 행동을 하는 이유와 관객이 감정을 느껴야 하는 순간, 카메라 위치와 편집 순서를 이해해야 AI가 생성한 장면도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 현장에서 경험한 프리비즈 작업 역시 원하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됐다.
“비싼 툴을 쓰고 프롬프트만 잘 쓴다고 좋은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건 아니에요. 캐릭터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어떤 장면에서 관객이 웃거나 슬퍼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결국 아는 만큼 보이는 거죠.”
AI 도구의 종류와 성능이 빠르게 달라지는 만큼 하나의 제작 방식에만 의존하지도 않는다. 프로젝트마다 필요한 기술과 작업 과정을 검토하고, AI를 어느 단계에 활용해야 효과적인지 작품을 제작하며 확인하고 있다.
2025년에는 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AI 제작 지원사업에 선정돼 ‘Mew & Bow’를 제작했고 해외 AI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경주의 빛’으로 APEC AI 공모전 우수상도 받았다. 홍 대표는 이러한 프로젝트를 통해 AI 영상 제작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동시에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공정과 기술을 축적하고 있다.
그에게 AI로 인상적인 장면 몇 개를 만드는 일과 처음부터 끝까지 완결된 애니메이션 한 편을 제작하는 일은 서로 다른 과제다. 짧은 영상에서 가능했던 제작 방식이 장편에서도 통할지, 캐릭터와 배경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연출 의도를 구현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계속 검증해야 할 부분이다.
일주일 만에 1600만 조회…‘마눌냥’으로 실험하는 IP 사업
스튜디오 여우별은 제작 기술을 연구하는 데서 나아가 자체 캐릭터를 활용한 IP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기존에는 애니메이션을 완성한 뒤 관객에게 공개하고 반응을 확인했다면, 숏폼 플랫폼에서는 캐릭터와 이야기를 먼저 선보이면서 어떤 요소가 관심을 얻는지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선보인 콘텐츠가 ‘마눌냥’이다. 홍 대표는 지난해 10월부터 구상해온 캐릭터와 이야기를 AI 기술을 활용해 영상으로 제작하고 인스타그램에 공개했다. 공개 일주일 만에 누적 조회수 1600만회를 기록했으며 같은 기간 팔로워도 약 2만6000명 증가했다. 첫 게시 후 24일 동안의 누적 조회수는 4000만회, 팔로워 수는 약 4만5000명에 달했다.
홍정민 감독의 캐릭터 애니메이션 프로젝트 마눌냥(Manul-nyang) 스틸컷. 공개 일주일 만에 조회수 1600만회, 24일 누적 조회수4000만회를 기록했다.
홍 대표는 높은 조회수가 곧바로 사업 성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캐릭터를 처음 공개하는 단계부터 시청자의 반응을 확인하고 팬을 모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제작 방식과 차이가 있다고 봤다. 어떤 캐릭터와 에피소드가 호응을 얻는지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발전시킬 수 있고, 팬층이 형성되면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상품과 라이선싱, 브랜드 협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할 가능성도 생긴다.
“예전에는 작품을 완성한 다음 관객을 찾아야 했다면 이제는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팬을 모을 수 있다는 거죠.”
이러한 전략은 현재 개발 중인 오리지널 IP ‘태권캣(Taekwon Cat)’에도 적용할 예정이다. 홍 대표가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작품으로, 올해 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기획창작스튜디오 콘텐츠 제작 지원에 선정돼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홍정민 감독이 연출한 3D 애니메이션 태권캣(Taekwon Cat) 스틸컷
최종 목표는 극장용 AI 하이브리드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다만 장편 제작이 끝날 때까지 캐릭터를 공개하지 않는 대신 세계관과 등장인물을 활용한 숏폼 콘텐츠를 먼저 선보이며 관객의 반응을 확인할 계획이다. 작품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팬덤을 형성하고, 그 반응을 바탕으로 캐릭터와 이야기를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이다.
홍 대표에게 숏폼은 장편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새로운 IP를 검증하는 무대다. 제작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기 전에 관객이 어떤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은 스튜디오가 시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제작 전략이기도 하다.
70억원에서 20억원 이하로…작은 스튜디오의 장편 제작 실험
홍 대표가 AI 제작 기술을 연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과거 ‘비운의 명장 흑치상지’를 준비하면서 최소 70억원 이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지금은 AI와 기존 제작 기술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제작비를 20억원 이하까지 낮추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물론 이 목표가 이미 검증된 것은 아니다. 90초짜리 단편을 짧은 시간 안에 완성한 경험만으로 장편 제작의 경제성을 입증할 수는 없으며, 긴 이야기 전체에 걸쳐 캐릭터와 장면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극장 상영에 필요한 완성도를 확보하는 과정도 남아 있다.
홍 대표 역시 현재의 AI 기술만으로 20억원 이하의 극장용 장편 제작이 가능하다고 단정하지는 않았다. 실제 작품을 개발하고 제작하면서 기술적·경제적 가능성을 계속 확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저는 단순히 제작비가 싼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규모가 작은 스튜디오도 좋은 이야기와 연출력이 있다면 자기 IP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그가 궁극적으로 완성하고 싶은 작품은 오리지널 뮤지컬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스물한 살에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보고 품었던 꿈으로, 이후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고 스톱모션과 영화·드라마 제작 현장을 경험한 과정도 그 목표와 연결돼 있다. 언리얼 엔진을 배우고 생성형 AI를 연구하게 된 것 역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제작 방법을 찾는 과정이었다.
기술이 달라져도 그가 만들고 싶은 작품의 방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AI가 영상 제작의 진입장벽을 낮출 수는 있지만 어떤 이야기를 선택하고 관객에게 어떤 감정을 전달할지 결정하는 일은 여전히 창작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돌아보면 기술은 계속 바뀌었는데 제가 만들고 싶은 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저에게 AI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찾은 또 하나의 제작 방법입니다.”
홍 대표 앞에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단편 제작에서 확인한 AI의 가능성을 장편으로 확장하고, ‘마눌냥’의 조회수와 관심을 지속 가능한 IP 사업으로 연결하는 한편, ‘태권캣’을 극장용 작품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제작비를 낮추면서도 작품의 완성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 역시 실제 제작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
그는 AI 애니메이션이 극장에 걸리는 첫 사례들이 앞으로 형성될 제작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술의 새로움만 앞세운 작품이 아니라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와 창작자의 책임이 담긴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70억원의 제작비 앞에서 시작된 고민은 결국 작은 스튜디오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완성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홍 대표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오늘도 새로운 제작 방식을 실험하고 있다. AI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제작 과정이지만, 그 기술로 어떤 이야기를 남길지는 여전히 감독의 선택에 달려 있다.
* 스타트업 생태계 기자단은 KAIA와 벤처스퀘어가 함께 운영하며 스타트업 현장의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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