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자가 지금 어느 방에 있는지 1초 만에 동선 파악… 병원을 ‘평면도’로 관리하는 CRM
-환자직원·공간·재고·매출·AI까지 아홉 개 영역을 한 화면에서
-레이어드허브와 토스랩이 함께 설계한 ‘잔디톡’…흩어진 여덟 개 상담 채널을 하나로
한 피부과 병원. 직원들이 모니터 하나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화면에는 입구와 라운지, 상담실, 레이저실, 리프팅룸까지 병원의 실제 공간이 그대로 옮겨져 있다. 그 위를 색색의 네모 칸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분주히 옮겨 다닌다. 칸 하나하나가 환자다. 접수를 마치면 빨간색으로 떴다가, 상담실로 들어가면 ‘상담 중’, 세안과 마취까지 끝나면 ‘준비 완료’로 색과 상태가 바뀐다. 원장이 콜을 누르면 알림음이 울리며 그 방이 ‘시술 중’으로 전환된다.
여느 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EP CRM’. 피부미용 의원인 에피소드의원이 쓰고 있다. 만든 사람은 에피소드의원의 원장이자 주식회사 레이어드허브(LayeredHub)의 서민호 대표다. 서 대표는 낮에는 환자를 진료하고, 진료가 끝나면 개발자로 ‘출근’한다.
서울 잠실 에피소드의원에서 레이어드허브 서민호 대표를 만나, 병원 전문 CRM을 왜 만들었는지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었다.
<사진설명> 레이어드 허브 대표이자 에피소드 클리닉 대표 원장인 서민호 대표(원장)가 EP CRM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직접 개발했습니다”
“개인 병원을 하다 보니 비효율적인 과정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걸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니 직접 개발까지 하게 됐고, 이걸 저만 쓰기보다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 창업하게 됐습니다.”
병원 운영에 필요한 프로그램은 이미 많다. 그런데도 서 대표는 의사 가운을 벗고 직접 개발에 나섰다. 이유가 뭘까.
시중 프로그램은 대부분 특정 기능에만 특화돼 있다. 환자 차트와 회원권을 관리하는 CRM, 재고·가격표·출퇴근을 다루는 프로그램, 외부 상담을 모아주는 채널 도구처럼 분야별 전문 프로그램이 따로 존재한다. 문제는 이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환자 한 명을 관리하려면 네다섯 개 프로그램을 오가야 했다. 병원 안에서도 사정은 같다. 원장과 직원, 고객이 실시간으로 연결돼야 하지만, 병원이 커지고 시술이 다양해지자 무전기나 구두 전달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해졌다. 더 근본적인 단절은 산업 전체에 있다.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 그 서비스를 받는 환자, 의료기기 업체 사이에 정보가 원활히 오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 단절의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고객이다. 정작 환자 자신이 받은 시술과 기록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 대표는 시중 프로그램을 모두 검토하고도 이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개발에 나섰다. 개발자 한 명, 외주 디자이너 한 명과 함께 1년 반 동안 손수 코드를 짜 만들었고, 지금은 자신이 운영하는 에피소드의원에서 직접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웬만한 업체는 거의 다 만나봤습니다. 그런데 회사들끼리 서로 도움을 주지 않아요. 서로가 라이벌이니까요. 이미 시장을 장악한 곳은 또 의사들이 보수적이다 보니 불편함이 크지 않으면 그냥 쓰던 걸 계속 씁니다. 그래서 결국 직접 만들게 됐습니다. 하나하나 부딪히면서 검색하고 고치다 보니 알게 됐어요. 남들이 그걸 바이브 코딩이라고 하더라고요”
병원의 모든 것을 평면도로 한 눈에 관리
EP CRM은 단순한 CRM이 아니다. 환자 관리는 기본이고, 가격표와 재고 정리 등 병원 운영 전반을 한 화면에서 처리한다. 실제로 환자, 직원, 공간, 재고, 시술, 예약, 매출, 마케팅, AI까지 아홉 개 영역을 하나의 시스템에서 다룬다. 기존에는 환자 차트와 회원권은 CRM에서, 직원 소통은 메신저에서, 외부 상담은 별도 채널에서, 재고·레시피·가격표·출퇴근은 스프레드시트에서 따로 관리해 환자 한 명에 네다섯 개 프로그램을 오가야 했다. 그 모두를 하나로 연계한 게 EP CRM이다. 서 대표가 EP CRM을 ‘클리닉(Clinic) 리소스 매니지먼트’라고 부르는 이유다.
EP CRM의 가장 큰 특징은 실제 병원 평면도를 기반으로 설계된 UI다. 환자마다 동선이 제각각이다. 누구는 상담만 받고 가고, 누구는 세안과 레이저, 관리까지 모두 받고 간다. 그래서 서 대표는 환자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평면도 위에 색깔로 표시해, 누구든 한눈에 동선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이 기술은 특허 출원 중이다. 작동 방식은 이렇다. 환자가 오면 패드에 이름과 연락처를 입력해 접수하고, 상담실장이 환자를 상담실로 옮기면 상태가 자동으로 바뀐다. 결제한 시술과 진행할 시술을 등록해 두면 각 팀이 그 환자가 무엇을 받는지 한눈에 안다. 세안, 마취, 원장 콜, 시술, 시술 완료, 귀가까지 모든 이동이 기록되므로, 어느 단계에서 병목이 생기는지까지 확인할 수 있다.
“다른 분들이 보기엔 너무 단순한 거 아닌가 싶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이 단순한 게 없어서 불편했거든요. 오히려 이 시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CRM은 결제 매출만 계산한다. 10회짜리 회원권을 끊으면 그날 전액이 매출로 잡히지만, 실제로는 그날 사용한 한 세션만큼만 매출이다. EP CRM은 결제 매출과 실사용 매출, 선수금 잔액, 잔여 회원권 등 네 가지로 구분해 보여준다.
“10회짜리를 등록했을 때 매출이 다 잡히지만 사실상 그건 10분의 1 매출이잖아요. 한 세션당 금액으로 정확히 보면, 어떤 날은 매출이 잘 나오고 어떤 날은 못 나왔어도 평균적으로 잘 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큰 병원에서는 의사나 실장의 그날 인센티브를 정확히 따질 때도 쓸 수 있고요. 병원장 입장에서 진짜 봐야 하는 숫자입니다.”
재고는 시술 때마다 자동으로 차감돼 언제 무엇을 다시 채워야 할지 한눈에 보이고, 직원 출퇴근과 시술 레시피, 가격표도 모두 같은 화면에서 관리된다. 환자가 어떤 경로로 들어와 어떤 시술을 결제했는지까지 연결돼, 인스타그램으로 유입된 고객의 특정 시술 결제율이나 재방문율 같은 마케팅 성과도 환자 단위로 추적할 수 있다. 따로 흩어져 있던 병원의 운영 데이터가 EP CRM 안에서 비로소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
환자 스스로 정보 확인 가능
EP CRM은 환자와의 관계를 잇는, 본래 의미의 CRM 역할도 한다. 병원 홈페이지와 직접 연동돼 고객별 전용 페이지를 제공하는데, PASS 인증을 거쳐야만 접근할 수 있어 개인정보는 안전하게 보호된다. 고객은 자신의 페이지에서 시술 내역과 담당 의사의 코멘트, 주의사항, 남은 시술 횟수, 회원권 잔액, 과거 기록, AI 피부 분석 결과까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상담팀에 들어오는 문의 중 상당수가 ‘시술이 얼마나 남았나요’, ‘언제 받았나요’, ‘몇 cc 들어갔었나요’ 같은 것들이에요. 환자들이 자신이 받은 시술 내용을 잘 모릅니다. 이제 마이페이지 링크로 이 모든 것을 다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객 스스로가 자신이 언제, 무엇을, 왜 받았는지, 어떤 주의사항이 있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의료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고, 자신의 의료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AI 기반 CRM
“AI 시대에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단순 반복 업무가 아니라, 기획과 데이터 설계입니다. 특히 병원 운영에는 수많은 맥락과 예외, 우선순위 판단, 그리고 현장에서만 알 수 있는 암묵지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도메인 지식은 AI가 가장 어려워하는 영역입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어떤 데이터를 봐야 하는지, 어떤 상황을 중요하게 판단해야 하는지, 어떤 업무가 먼저 처리되어야 하는지는 결국 현장을 아는 사람이 설계해야 합니다.”
EP CRM은 피부과 운영자의 도메인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CRM이다. 예약, 상담, 시술기록, 고객정보, 결제, 재고, 직원 업무, 사후관리 등 원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데이터를 하나의 구조로 연결한다. 이렇게 모든 정보가 연결된 CRM은 향후 에이전트 AI가 도입될 때 가장 큰 가치를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에이전트 AI는 단순히 질문에 답하는 AI가 아니라, 병원 데이터를 읽고 필요한 업무를 판단하며 다음 행동까지 제안하는 AI다. EP CRM 이용자는 복잡한 조회나 분석 과정 없이, 단순한 명령어 하나만으로 원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 예약자 중 VIP, 미수금, 재시술 필요 환자를 체크해서 실장에게 알려줘’ ‘현재 재고 소진 추이를 바탕으로 추가 주문이 필요한 품목을 정리해줘’ ‘이번 달 예약 건수가 가장 많은 시술과 매출액이 가장 높은 시술을 순위별로 나열해줘’ ‘상담만 받고 결제하지 않은 고객 중 재상담 우선순위를 뽑아줘’ ‘오늘 시술 완료 고객에게 맞춤형 주의사항 메시지를 자동으로 준비해줘’와 같은 명령으로 원내 상황을 파악하고 필요한 업무를 실행할 수 있다.
어떤 도메인 지식이 설계돼 있고 어떤 데이터가 연결돼 있는지가 진짜 차이를 만든다. EP CRM은 피부과의 운영 데이터를 연결하고 도메인 지식을 구조화해, 에이전트 AI가 실제 병원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피부과 특화 AI 운영 플랫폼이다. 피부미용의원의 실제 운영 구조를 이해하는 AI CRM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혁신적인 기술은 없습니다. 레이어드허브가 집중한 건 통합이에요. 그런데 이 통합은 도메인 지식을 가진 현업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자본이 많은 곳은 구석구석 디테일을 모르고, 현업에서 잘 아는 사람은 개발 지식이 부족하니 못 했던 거죠. 조금만 써봐도 원장님과 직원분들이 그동안 불편했던 부분이 해결되는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라고 서 대표는 강조했다.
외부 채널 통합 시스템 ‘잔디톡’ 서비스 개발 협력
EP CRM을 만든 뒤에도 서 대표는 분주하다. 토스랩의 신규 서비스인 잔디톡 개발에 함께 동참했기 때문이다. 계기는 다시 현장이다.
고객이 병원을 찾는 채널은 갈수록 다양해진다. 예약 문의는 카카오톡과 네이버 톡톡이 기본이고, 외국인 고객이 늘면서 위챗, 왓츠앱, 라인까지 더해졌다. 상담팀이 채널마다 일일이 접속해 확인하려니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8개의 외부 채널을 하나로 모아주는 잔디톡 상담채널 화면>
흩어진 외부 채널을 한데 모아줄 시스템이 필요했다. 서 대표는 새 도구를 찾는 대신, 내부 협업툴로 쓰던 ‘잔디(JANDI)’에 그 기능을 더하는 편이 낫다고 봤다. 봉직의 시절부터 여러 협업툴을 거쳤지만 병원에 가장 잘 맞은 건 잔디였다. 서 대표는 병원을 일반 회사와 식당 같은 자영업이 섞인 모델로 본다. 두고두고 찾아봐야 하는 정보와 실시간으로 모두가 알아야 하는 정보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잔디는 대화가 ‘토픽’으로 나뉘고 댓글을 달면 최신 스레드 형식의 최신 대화로 올라와, 장기적으로 쌓을 정보와 당장 챙길 정보가 자연스럽게 구분된다. 업무 우선순위까지 정리되는 셈이다. 직관적인 사용경험으로 IT에 익숙하지 않은 직원도 금세 익히고, 업무용이다 보니 퇴근 후 알림만 꺼두면 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점도 컸다. 서 대표는 “잔디는 본질에 충실해서 직원들이 처음부터 쓰기 편해요. 처음 보는 직원도 한두 시간이면 익숙해집니다.”라고 잔디를 내부 협업툴로 쓰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렇게 서 대표는 협업툴 잔디를 운영하는 토스랩(Toss Lab)의 신규 서비스인 ‘잔디톡’의 상품화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잔디를 오래 써 온 에피소드의원의 구체적인 니즈를 토스랩이 받아 빠르게 상품화했고, 최근 베타 버전을 출시해 3분기 정식 출시를 앞두고 있다. EP CRM과의 연동을 위한 PoC도 함께 진행 중이다.
대다수 채팅 상담 플랫폼이 업종을 가리지 않는 범용 도구라면, 잔디톡은 처음부터 피부과·성형외과 같은 미용의료 현장만을 겨냥해 설계됐다. 게다가 설계를 이끈 사람은 병원을 직접 운영하는 원장이다. 어떤 문의가 잦고 상담이 어디서 막히며 예약이 어디서 어그러지는지, 매일 겪은 사람의 경험이 녹아 있으니 그만큼 현장에 잘 들어맞는다.
핵심은 흩어진 상담 채널을 하나의 인박스로 모은 것이다. 카카오톡 상담톡과 네이버 톡톡, 왓츠앱(WhatsApp), 인스타그램 DM, 페이스북 메신저, 라인(LINE), 위챗(WeChat), 웹채팅까지 여덟 개 채널을 한 화면에서 주고받을 수 있어, 상담팀이 채널마다 앱을 따로 열 필요가 없다. 자동응답봇이 1차 문의를 처리하고, 대화 중에 예약까지 바로 연결된다. 여기에 담당자 자동 배정, 팀원 간 내부 메모, 아직 배정되지 않은 문의를 보여주는 미배정 안내 바까지 더해 적은 인원으로도 여러 채널을 놓치지 않고 응대하도록 했다. 무엇보다 토스랩의 협업툴 잔디와 연동돼, 상담 케이스를 잔디 토픽으로 넘기면 외부 상담이 그대로 내부 협업으로 이어진다.
환자 관리와 병원 운영을 아우르는 EP CRM에 외부 채널을 통합하는 잔디톡까지, 서 대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 단계는 흩어진 환자 기록을 모아주는 서비스에 EP CRM을 결합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환자는 어느 병원에서 무엇을, 언제 받았는지를 스스로 알게 된다. 레이어드허브가 이름 그대로 진짜 ‘허브’가 되는 순간이다.
더 나아가 서 대표가 그리는 건 미용의료산업을 떠받치는 세 주체가 모두 윈윈하는 구조다. 고객은 정확한 정보와 더 나은 결과를 얻고, 병원은 운영 효율화로 경영을 개선하며, 업체는 더 효율적인 정보 전달과 마케팅 환경을 갖는다. 연결될수록 모두의 몫이 커지는 그림이다. 한 피부과 원장이 직접 코드를 짜며 그려가는 그 그림이, 미용의료 현장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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