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을 수술로 제거한 뒤에도 환자의 몸에는 미세한 암세포가 남아 있을 수 있다. 혈액 속 암 유래 DNA를 분석하는 액체생검은 이러한 흔적과 치료 이후의 변화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연구되고 있지만, 정상 DNA 사이에 극히 적은 비율로 섞여 있는 암 관련 변이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검출 대상의 양이 적어질수록 정확한 분석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특히 수술 후 체내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암세포의 흔적을 확인하려면 정상 DNA에 섞인 미세한 변이까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홍성철 교수는 이러한 진단 기술의 과제를 단일분자 생물물리학 연구를 통해 풀어가고 있다. 그가 2006년부터 연구해 온 분야는 개별 분자의 움직임과 반응을 관측하는 기술이다. 수많은 분자의 평균적인 반응을 측정하는 대신, 분자 하나가 다른 분자와 결합하고 떨어지는 과정을 관찰한다. 극히 적은 양의 생체물질을 구별해야 하는 진단 기술에도 이러한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오랜 연구는 2022년 10월 바이오 벤처기업 심플리바이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연구실에서 축적한 단일분자 검출 기술을 사업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후 혈액 속 암 유래 DNA를 분석하는 플랫폼 ‘SIMUL’을 개발했으며, 현재는 폐암 환자의 혈액을 활용한 임상 연구와 전용 검사 장비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기초물리학 연구에서 출발한 기술이 의료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암 진단 기술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분자 움직임 분석에서 시작된 암 진단 기술 개발
홍 대표의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분자 하나가 남기는 신호다. 단일분자 생물물리학은 수많은 분자의 평균적인 반응을 측정하는 방식에서 나아가 개별 분자가 어떻게 움직이고 상호작용하는지 직접 관찰하는 분야다. 분자 하나가 다른 분자와 결합하고 분리되는 과정을 분석하면 개별 반응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극히 적은 양의 생체물질을 구별해야 하는 진단 기술에도 활용될 가능성을 지닌다.
연구의 중요한 전환점은 2013년에 마련됐다. 당시 홍 대표 연구실은 세균 유래 단백질인 아고노트(Argonaute)를 이용해 핵산을 검출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짧은 DNA 탐침에 아고노트를 결합하면 탐침이 표적 RNA를 찾아가는 속도가 크게 빨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이를 질병 표지 물질 측정에 응용하는 연구로 발전시켰다.
그 결과 개발한 기술이 ‘Ago-FISH’다. 2020년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아고노트를 활용한 탐침은 일반 탐침보다 20배 이상 빠르게 표적과 결합했다. 염기 하나만 다른 마이크로RNA까지 구별할 수 있다는 점도 확인했다. 표적을 빠르게 찾아내면서 미세한 염기 차이까지 식별하는 성과였다.
하지만 검출 속도를 높이는 것만으로 정확한 분석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탐침과 표적의 결합을 늘리기 위해 탐침 농도를 높이면 주변에 떠다니는 탐침에서도 형광이 발생했다. 표적에 결합한 탐침이 내는 신호와 주변에서 발생하는 형광을 구별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가 생긴 것이다.
연구실은 두 형광 분자 사이의 에너지 전달을 이용하는 ‘Dynamic FRET-FISH’로 해결책을 찾았다. 표적과 결합한 탐침의 형광 신호만 구별해 읽는 기술로, 2022년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표적을 빠르게 찾아내는 기술에 이어 실제로 필요한 신호를 선별하는 방법까지 개발한 셈이다.
이처럼 축적한 연구 성과는 심플리바이오 창업의 기반이 됐다. 개별 분자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기술을 질병 진단에 필요한 정보를 얻는 방법으로 발전시키고, 연구실에서 확인한 분자의 반응을 실제 환자의 검사에 활용할 수 있는 기술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
혈액 속 0.001% 미만의 암 변이를 검출하는 단일분자 분석 기술
심플리바이오가 단일분자 검출 기술을 적용한 대상은 혈액 속에 극히 적은 비율로 존재하는 암 유래 DNA다. 혈액에는 정상세포와 암세포에서 유래한 DNA가 함께 존재한다. 암 관련 변이의 비율이 낮을수록 이를 구별하기 어려워지며, 특히 암 수술 이후의 상태를 확인하려면 미세한 변이까지 식별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기존에 개발한 핵산 검출 기술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연구도 필요했다. 앞선 기술이 한 가닥으로 이뤄진 핵산을 대상으로 했다면, 혈중 암 DNA는 두 가닥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닥의 DNA에서 원하는 변이를 검출하려면 분석 대상에 맞는 새로운 과정이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한 플랫폼이 ‘SIMUL’이다. 검출하려는 DNA 변이 부위를 중합효소연쇄반응(PCR)으로 증폭한 뒤 효소를 이용해 한 가닥만 남기고, 해당 변이에 결합하는 형광 탐침을 투입한다. 이후 칩 위에 나타난 형광 신호를 촬영해 개별 분자의 결합 반응을 분석하는 방식이다. 단일분자 관측에서 확보한 기술을 혈액 속 암 변이 검출에 적용한 것이다.
홍 대표는 기술 개발의 핵심에 대해 “정상 DNA에 극히 적은 비율로 섞여 있는 암 유래 DNA를 찾아내는 것이 핵심”이라며 “분자 하나에서 발생하는 형광 신호와 결합 패턴을 분석하는 기술을 혈액 속 암 변이 검출에 적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SIMUL은 형광 신호의 개수뿐 아니라 탐침이 표적에 결합하고 분리되는 시간적 패턴까지 분석한다. 회사가 제시한 실험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형광으로 빛나는 점의 개수를 세는 방식에서는 변이 비율 0.05% 미만까지 검출했다. 여기에 탐침의 결합과 분리 패턴을 분석하는 방법을 적용하자 0.001% 미만의 변이도 구별할 수 있었다.
이 결과는 정상 DNA에 변이 DNA를 일정 비율로 혼합한 시료에서 확인한 분석 성능이다.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진단 성능과는 구분된다. 심플리바이오는 이러한 검출 원리가 환자의 혈액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폐암 환자 25명의 혈장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암 관련 유전자인 ‘KRAS’의 변이 세 종류를 분석했다. 회사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총 5건의 변이를 검출했으며, 건강한 사람의 혈장에서는 해당 변이가 확인되지 않았다. 검출된 변이의 비율은 0.13~0.27% 수준이었다. 실험실에서 개발한 검출 기술을 실제 환자 혈액에 적용해 분석한 결과다.
여러 종류의 생체표지자를 동시에 분석하는 연구도 진행했다. 암 조기진단 가능성을 살펴보기 위해 개발한 다중 생체표지자 분석 패널 ‘SiMBA’는 마이크로RNA 3종과 단백질 2종, KRAS 변이 3종, DNA 메틸화를 함께 측정한다. 개별 변이 검출에서 나아가 서로 다른 생체표지자를 결합해 분석하는 방식이다.
건강한 사람 90명과 1~2기 비소세포폐암 환자 6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두 집단을 구분하는 곡선하면적(AUC)이 0.924로 나타났다. AUC는 검사 결과가 두 집단을 얼마나 잘 구분하는지 평가하는 지표로, 1에 가까울수록 구분 능력이 높다는 의미다. 여러 생체표지자를 함께 분석하는 기술의 암 조기진단 활용 가능성을 살펴본 성과다.
다만 이 연구는 이미 구분된 폐암 환자군과 건강인 집단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수술 후 체내에 남아 있는 암세포의 흔적을 확인하는 미세잔존암 검사나 재발 예측 성능을 직접 입증한 결과는 아니다. 실제 의료 현장에서 이러한 목적으로 기술을 활용하려면 추가적인 임상 검증이 필요하다.
현재 심플리바이오는 비소세포폐암 환자 82명의 혈액을 대상으로 SIMUL과 디지털 PCR의 분석 결과를 비교하는 임상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회사는 2026년 12월까지 연구를 마치고, 2027년에는 급성골수성백혈병과 대장암, 유방암으로 파일럿 연구를 확대할 계획이다.
연구실에서 확인한 검출 성능이 실제 환자의 혈액에서도 유효한지 근거를 축적하는 과정이다. 극히 적은 양의 변이를 구별하는 기술을 개발한 데 이어, 그 성능을 임상 환경에서 검증하는 것이 현재의 과제다.
동반진단에서 미세잔존암 검출까지, 임상 적용 범위 확대 추진
기술 개발이 진전되면서 심플리바이오는 사업화의 우선순위도 구체화했다. 2025년 상반기까지 우선적으로 검토한 분야는 특정 표적항암제에 적합한 환자를 선별하는 동반진단이었다. 비소세포폐암의 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EGFR) 변이를 검출하는 탐침 50종을 개발하고, 차세대염기서열분석(NGS) 기반 혈액 검사와 성능을 비교하는 임상을 준비했다.
이후 회사는 첫 사업 분야를 미세잔존암 검출과 치료반응 모니터링으로 변경했다. 동반진단 시장은 기존 기업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인허가 진입장벽도 높았다. 반면 미세잔존암 검사에는 기존 기술로 해결하기 어려운 수요가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확보한 기술을 어느 의료 분야에 우선 적용할 것인지 사업화의 방향을 조정한 것이다.
홍 대표는 “처음에는 표적항암제 사용 환자를 선별하는 동반진단을 검토했다”며 “이후 기존 검사 기술의 한계와 의료 현장의 수요를 고려해 미세잔존암 검출과 치료반응 모니터링을 우선 사업 분야로 정했다”고 말했다.
검사 기술의 상용화를 준비하며 의료 현장의 요구도 확인했다. 심플리바이오가 국내 상급병원 종양내과 교수들을 인터뷰한 결과, 의료진은 기존 NGS 기반 검사에서 결과를 받기까지 약 2주가 소요되는 점과 검사 정확도의 개선 필요성을 제기했다. 검사 결과를 신속하게 제공하는 능력이 사업화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과제로 제시된 것이다.
이에 회사는 검사 소요 시간을 6시간 미만으로 단축해 당일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극히 적은 암 유래 DNA를 구별하는 민감도와 함께 검사 속도를 높이는 데도 연구개발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초기 사업 모델은 병원 검사실과 협력해 제공하는 검사 서비스다. 의료기관과 연계해 임상적 활용 경험을 축적한 뒤 글로벌 진단 기업을 대상으로 기술이전을 추진하고, 전용 장비와 소모품 공급으로 사업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회사가 설정한 목표 검사료는 국내 건당 100만 원, 미국 건당 1,000달러다. 검사 서비스에서 출발해 기술과 장비를 공급하는 사업으로 수익 구조를 넓히려는 구상이다.
상용화를 위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과제는 검사 장비의 자동화다. 현재 SIMUL은 자체 개발한 전반사 형광 현미경과 분석 소프트웨어를 결합한 수동 시제품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병원 검사실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려면 검사 과정을 자동화하고 안정적인 운용 체계를 갖춘 전용 장비가 필요하다.
심플리바이오는 이러한 기능을 구현할 전용 장비 ‘Simfli-X’를 개발하고 있으며, 2027년 3월까지 시제품을 완성할 계획이다. 연구실에서 확보한 검출 원리를 의료기관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검사 시스템으로 구현하기 위한 단계다. 홍 대표는 현재 자체 개발한 현미경과 분석 소프트웨어를 활용하고 있으며, 향후 검사 과정을 자동화한 전용 장비를 개발해 검사 서비스와 장비 공급으로 사업을 확장한다는 구상이다.
연구실의 기술을 의료기관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제품으로 발전시키려면 분자 분석 기술뿐 아니라 광학 장비와 소프트웨어 개발, 진단 산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심플리바이오는 홍 대표의 단일분자 연구를 기반으로 광학 하드웨어와 분석 소프트웨어, 탐침 설계 분야의 개발 인력을 구성했다. 분자의 신호를 검출하고 분석하는 기술부터 검사 장비의 구현까지 연구개발 기능을 연결한 구조다.
핵심 기술 개발은 홍 대표 연구실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강찬신 최고기술책임자(CTO)가 이끌고 있다. 사업개발은 일루미나 코리아 등 진단 업계에서 20년 이상 경력을 쌓은 박창원 최고전략책임자(CSO)가 담당한다. 삼성서울병원 종양내과 박세훈 교수는 회사 주주로 참여해 전략 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기초 연구와 진단 업계의 사업 경험, 의료 현장의 전문성을 결합한 인력 구성이다.
사업 확대에 필요한 자금은 외부 투자와 정부 연구개발 과제를 통해 확보하고 있다. 심플리바이오는 2025년 프리A 투자에서 19억 원을 유치했으며, 같은 해 10월 ‘딥테크 팁스’에 선정됐다. 2026년 5월에는 민관공동 기술사업화 과제에도 선정되며 후속 개발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확보한 자금을 토대로 임상 검증과 제품 개발을 병행하고 있다.
해외 사업도 국내 임상 검증과 검사 장비 개발을 기반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회사는 국내에서 임상적 근거를 축적한 뒤 2028년 미국 임상검사실개선법(CLIA) 인증 검사실과 협약을 체결하고, 2029년부터 검사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국내 의료기관과의 협력에서 출발해 해외 검사 서비스로 사업 범위를 확대하려는 구상이다.
장기적으로는 암 진단 기술의 적용 범위도 넓힐 계획이다. 미세잔존암 검출과 치료반응 모니터링 분야에서 출발해 췌장암과 대장암 등 암 조기진단 분야로 연구와 사업을 확장한다는 것이다. 혈액 속 암 관련 변이를 분석하는 기술을 다양한 암종의 조기 발견에 활용하는 방향이다.
2006년 개별 분자의 움직임과 반응을 관측하는 연구를 시작한 홍성철 대표는 20년간 축적한 단일분자 기술을 바탕으로 암 진단 분야의 사업화를 추진하고 있다. 분자 하나에서 발생하는 신호를 읽는 연구에서 출발해 혈액 속 암 유래 DNA를 검출하는 플랫폼을 개발했고, 이제는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그 활용 가능성을 검증하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연구실에서 확인한 분석 성능을 임상 환경에서 입증하고, 이를 의료기관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검사 시스템으로 발전시키는 일이다. 개별 분자의 미세한 신호를 관측하는 기술이 암 치료 이후의 변화를 더 이른 시점에 확인하는 검사로 이어질 수 있을까. 심플리바이오가 축적해 나갈 임상 연구 결과에 그 답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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