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처음 제정된 한글날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한 세기 전 한글의 가치를 알리고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시작된 기념일은 이제 디지털 기술과 콘텐츠, 브랜드 디자인, 인공지능(AI)을 통해 한글의 새로운 쓰임을 확인하는 날이 됐다. 기업들도 한글날을 맞아 서체를 개발하고 한글로 쓴 기록을 디지털 공간에 남기는 한편, 어린이의 문해력 교육과 한국어 프로그래밍 언어 개발까지 각자의 기술과 서비스를 활용한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올해 기업들의 한글날 활동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한글을 기념하는 방식이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네이버는 지난 100년간의 기록을 디지털 콘텐츠로 되살렸고, 산돌과 여기어때는 브랜드 서체를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AI 교육 스타트업 에이치투케이는 한글 학습 기회를 나누는 캠페인을 진행하며, 카이스트(KAIST) 재학생이 창업한 셈틀은 한국어 문장으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언어를 공개했다. 한글이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디지털 환경에서 실제로 읽고 쓰고 개발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사례들이다.
네이버가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기념해 진행하는 ‘모두의 한글’ 캠페인. 지난 100년간의 한글 기록과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는 한글의 가치를 조명한다. (자료 제공: 네이버)
한글을 디지털 환경에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온 대표적인 기업은 네이버다. 2008년부터 19년간 한글 캠페인을 이어온 네이버는 올해 ‘모두의 한글’을 주제로 10월 1일부터 18일까지 한글날 제정 100주년 캠페인을 진행한다. 한글의 역사와 기록을 돌아보는 동시에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한글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소개한다.
‘100년의 한글’에서는 1926년 박두성 선생이 만든 한글 점자부터 1955년 아버지가 남긴 글, 2003년 주부의 가계부까지 시대별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민음사의 인문잡지 《한편》과 협력한 ‘10인의 한글’에는 작사가와 시인, 서체 디자이너, 데이터 분석가, 국어국문학자 등이 참여했다. 이용자가 직접 한글 문장을 작성해 카드로 만들거나 블로그에 공유하는 ‘나만의 한글’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네이버 해피빈 이일구 대표는 “한글은 네이버의 서비스와 콘텐츠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기반인 만큼 지난 19년간 일회성 기념에 그치지 않고 한글의 쓰임과 기록을 넓히는 활동을 꾸준히 이어왔다”고 말했다.
여기어때가 한글날을 맞아 진행하는 ‘잘난체 찾고 여행어때’ 이벤트. 일상에서 발견한 브랜드 서체 ‘잘난체’를 제보하면 추첨을 통해 여행 포인트를 지급한다. (자료 제공: 여기어때)
기업의 브랜드가 된 한글…글꼴에서 일상의 콘텐츠로
한글을 브랜드 자산으로 활용하는 기업들의 활동도 활발하다. 여기어때는 자체 개발해 무료 배포한 브랜드 서체 ‘잘난체’ 시리즈를 활용해 일상 속 글꼴을 찾는 참여형 이벤트를 진행한다. 길거리 간판이나 영상 자막, 상품 포장 등에서 잘난체를 발견해 사진과 장소를 제보하면 올해 12월까지 매월 추첨을 통해 여기어때 5만 포인트를 지급한다.
‘여기어때 잘난체’와 ‘여기어때 잘난체 고딕’은 브랜드의 경쾌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글자에 담은 서체다. 한글 1만1172자를 비롯해 라틴 문자와 특수문자 등을 지원하며, 무료 배포 이후 웹툰 표지와 이모티콘, 영상 자막 등 다양한 콘텐츠에 활용되고 있다. 이번 이벤트는 기업이 만든 서체가 실제 소비자의 생활공간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확인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산돌과 BGF리테일이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기념해 공동 개발한 브랜드 서체 ‘SD CU 좋은친구’. CU의 친근하고 활기찬 이미지를 글자에 담았다. (자료 제공: 산돌)
산돌은 편의점 CU를 운영하는 BGF리테일과 협업해 ‘SD CU 좋은친구’ 서체를 출시했다. CU의 브랜드 키워드인 친근함과 활기참을 글자의 형태에 반영하고, 작은 안내 문구부터 대형 간판까지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발했다. 출시를 기념해 3개월 무료 이용권을 제공하며 연말에는 해당 서체를 적용한 과자와 굿즈도 선보일 예정이다.
산돌은 그동안 여기어때 잘난체와 삼립호빵체, 리디바탕 등 기업의 개성을 담은 글꼴 개발에 참여해왔다. 브랜드 전용 서체가 광고와 디자인에 사용되는 것을 넘어 소비자가 직접 내려받아 콘텐츠를 만들고, 다시 상품과 패키지에 적용되는 흐름을 보여준다.
윤디자인은 한글문화연대가 한글날 100주년을 맞아 창간한 온라인 매체 ‘한글신문’의 제호 디자인에 재능기부로 참여했다. 훈민정음의 기하학적 형태를 초성에 반영하면서 고딕 계열의 글자 구조와 부드러운 곡선을 활용해 현대적인 이미지를 구현했다. 한글 관련 매체에서 흔히 사용하는 전통적인 서체 표현 대신 젊고 진취적인 인상을 전달하는 데 중점을 뒀다.
기업들이 서체를 통해 한글의 시각적 가능성을 확장한다면, 교육기술 기업들은 한글을 배우는 과정에 기술을 적용하고 있다.
윤디자인이 한글문화연대의 온라인 매체 ‘한글신문’ 창간을 위해 재능기부로 제작한 제호 디자인. (자료 제공: 윤디자인)
AI로 한글을 배우고, 한국어로 프로그램까지 만든다
AI 기반 한글 교육 앱 ‘소중한글’을 운영하는 에이치투케이(H2K)는 10월 7일부터 9일까지 제7회 ‘한글 나눔 캠페인’을 진행한다. 2020년 시작된 이 캠페인은 이용권이 한 건 판매될 때마다 동일한 수량의 이용권을 한글 학습 지원이 필요한 아동에게 기부하는 방식이다. 올해는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기념해 1년 이용권을 80% 할인된 가격에 제공한다.
소중한글은 AI를 활용해 아동의 한글 수준을 진단하고 해득과 받아쓰기, 문해력까지 단계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서비스다. 에이치투케이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홀트아동복지회, 지파운데이션 등 복지기관과 협력해 저소득층과 다문화가정, 한부모가정 등에 학습 이용권을 전달해왔다.
에이치투케이 홍창기 대표는 “한 가정의 배움이 또 다른 아이의 배움으로 이어지는 이번 캠페인을 통해 더 많은 분들이 한글의 가치와 나눔의 의미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맞아 에이치투케이가 진행하는 AI 한글 교육 앱 ‘소중한글’의 제7회 한글 나눔 캠페인. (사진 제공: 에이치투케이)
한글을 교육하는 기술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한국어 자체를 프로그래밍 언어로 만든 사례도 등장했다. 스타트업 셈틀은 한글날인 9일 한국어 문장 형태로 앱과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 언어 ‘훈민정음’과 전용 개발 도구인 ‘훈민정음 IDE(통합개발환경)’를 공개했다.
일반적인 프로그래밍 언어가 영어 기반 명령어와 문법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훈민정음은 한국어 문장의 구조를 살려 코드를 작성하도록 설계됐다. 예를 들어 “버튼의 내용은 ‘관람 신청’이고, 누르면 관람신청하기를 실행한다”처럼 프로그램의 동작을 한국어 문장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개발자인 오현우 셈틀 대표는 고등학생이던 2022년 한국어로 프로그래밍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언어 개발을 시작했다. 현재 KAIST 전산학부에 재학 중인 그는 고교 시절 앱 내부에서만 실행되던 언어를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앱, 컴퓨터 프로그램, 서버까지 개발할 수 있는 도구로 발전시켰다.
셈틀이 한글날을 맞아 공개한 한국어 기반 프로그래밍 언어 ‘훈민정음’. 한국어 문장으로 앱과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다. (자료 제공: 셈틀)
실제 서비스에도 적용했다. 여행지의 현재 상황을 질문하면 현지에 있는 이용자가 답하는 앱 ‘현문현답’은 사용자용 앱과 서버 코드를 훈민정음으로 작성했다. 셈틀에 따르면 전용 개발 도구와 작성한 코드를 실행 가능한 프로그램으로 변환하는 컴파일러 역시 훈민정음으로 개발했다. 컴파일러의 결과를 대조할 수 있는 검증 자료도 함께 공개했다.
오현우 대표는 훈민정음 서문의 ‘사람마다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라는 구절을 언급하며 “한글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택받기를 기다리지 않겠다. 처음 시작하는 길을 더 쉽게 만들고, 막히는 곳을 먼저 고치고, 매일 쓰는 제품으로 증명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한국어 프로그래밍 언어가 실제 개발 현장에서 얼마나 활용될지는 앞으로 확인해야 한다. 기존 개발 도구와의 호환성, 개발자 생태계, 유지보수 편의성 등이 함께 검증돼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영어 중심의 프로그래밍 환경에서 한국어 문장을 개발 언어로 구현하고 실제 앱에 적용했다는 점에서 한글의 기술적 활용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는 사례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맞아 등장한 기업들의 활동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출발했지만 한글을 더 많은 사람이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기록을 디지털로 보존하고, 글꼴을 무료로 배포하며, AI로 학습을 지원하고, 한국어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시도까지 한글의 활용 범위는 다양해졌다. 이러한 기술과 서비스가 기념일을 넘어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가 앞으로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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