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마하라슈트라의 한 시골 마을에서 김진아 대표는 의사에게 뜻밖의 말을 들었다. 이 마을 사람들의 피가 평균치의 절반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생긴 심각한 빈혈이었다. 봉사팀이 철분제를 나눠주면 잠시 나아졌지만 약이 떨어지면 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30대였던 김 대표에게 이 경험은 일시적인 지원만으로 사람들의 삶을 바꾸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을 남겼다. 약을 계속 나눠주는 것보다 스스로 소득을 만들고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인도를 찾은 계기는 선교였다. 현지에서는 종교를 바꾸는 일이 생계의 기반인 카스트에서 벗어나는 문제와도 얽혀 있었고, 사람의 삶을 바꾸는 데는 경제적인 기반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현실을 현장에서 접했다. 이후 이스라엘 벤처캐피털 요즈마의 인큐베이팅 센터 총괄이사를 맡아 창업 보육을 경험했고, 2017년에는 인도 시장에 특화한 크로스보더 액셀러레이터 유니콘인큐베이터를 설립했다.
유니콘인큐베이터는 한국 기업의 인도 진출을 지원하는 크로스보더 액셀러레이터다. 지난 9년 동안 코로나19와 한류 확산, 인도의 디지털 전환을 지켜보며 한국 기업을 현지 시장으로 연결해왔다. 하지만 세계 최대 인구를 가진 거대한 시장이라는 기대가 곧바로 사업 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김 대표가 9년간 현장에서 확인한 것은 오히려 어떤 기업이 인도에서 살아남고, 어떤 기업이 결국 돌아오는가였다.
유니콘인큐베이터 김진아 대표
9년간 60여 개사 인도로…현지 사업 이어간 기업은 30%
2017년 이후 매년 배치 프로그램을 운영해 올해 8기까지 누적 60여 개사를 지원했다. 인도 고객사와의 미팅은 200건을 넘어섰고 투자의향서와 실증을 포함한 협약·계약도 60건에 이른다. 다만 프로그램 이후에도 인도에서 사업을 계속하는 기업은 약 30%로, 시장 진입과 현지 사업을 지속하는 일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있었다.
초기에는 창업 2~3년 차 기업들도 프로그램에 참여했지만 국내에서 사업 기반을 충분히 갖추기 전에 인도에서 새로운 고객과 파트너를 찾고 사업화까지 동시에 진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기업의 진출 과정을 지켜본 유니콘인큐베이터는 점차 국내에서 일정 수준의 사업화 경험을 갖춘 성장 단계 이상의 기술 기업으로 선발 대상을 조정했고, 이들이 현지에 진입하면 IIT와 경제단체, 지자체 등 그동안 구축한 네트워크를 활용해 필요한 파트너를 찾도록 지원했다.
선발 과정에서는 기술과 아이템뿐 아니라 회사가 인도 사업을 실제로 추진할 준비가 돼 있는지도 함께 살핀다. 김 대표가 직접 기업을 찾아가 의사결정 권한을 가진 C레벨부터 사업을 담당할 실무자까지 한자리에 모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해외 진출을 담당자 개인의 업무로 맡기는 것과 경영진이 사업의 한 축으로 결정하고 움직이는 것은 현지에서 필요한 의사결정의 속도부터 달랐다.
AI 기반 차량 모니터링 기술과 배터리(BESS) 관련 기술을 보유한 델타엑스는 대표와 임원이 선발 과정부터 직접 참여한 기업으로, 하이데라바드에 지사를 설립한 데 이어 안드라프라데시에서 배터리 공장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현지 사업 과정에서도 유니콘인큐베이터가 보유한 경제단체와 지자체, 인도공과대학(IIT) 네트워크를 활용하면서 사업 기반을 마련해왔다.
반면 실무자 한 명에게 인도 진출을 맡긴 기업은 현지에서 기회가 생겨도 빠르게 대응하기 어려웠다. 회사 내부의 합의가 충분하지 않거나 담당자에게 결정권이 없으면 샘플 하나를 보내는 데도 본사의 승인을 기다려야 했고, 현지 파트너와 협의할 때마다 다시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야 했다. 김 대표가 기업을 선발할 때 C레벨의 참여 여부를 중요하게 보는 것도 9년 동안 이런 차이를 반복해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시장 규모를 판단할 때도 단순한 인구 계산보다 실제 사업이 이뤄질 지역과 정책, 산업 구조를 먼저 살핀다. 14억 명이 넘는 인구에 예상 객단가를 곱하면 거대한 시장이 만들어지지만 인도는 주마다 정책과 법령이 다르고 산업 기반과 소비시장에도 차이가 크다. 어느 지역에서 누구를 고객으로 삼고 어떤 파트너와 사업할 것인지 구체화해야 하며, 그 과정에 의사결정권자가 직접 참여할 때 현지에서 발생하는 변수에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테크 상감’, 한국의 기술과 인도의 영업을 합치다
9년 동안 한국 기업의 인도 진출을 지원하면서 김 대표는 한국과 인도가 서로 잘하는 영역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한국 기업이 기술력과 품질을 앞세운다면 인도 기업과 인재들은 상대의 요구를 빠르게 파악하고 거래를 만들어내는 영업에 강했다면 한국 기업이 현지 사업을 위해 유학 경험이 있는 신입 직원 등을 통역으로 배치했을 때는 언어는 전달돼도 기술과 사업의 맥락까지 충분히 전달되지 않아 거래가 어긋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 5월 25일 뉴델리에서 ‘테크 상감(Tech Sangam)’을 출범했다. ‘상감’은 힌디어로 두 물길이 만나 하나로 흘러간다는 의미로, 한국 기업이 강점을 가진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인도의 기업과 인재가 현지에서 기술을 이해해 영업과 사업화를 담당하는 협업 구조를 담았다. 한국 기업이 인도 진출에 필요한 모든 역할을 직접 수행하기보다 서로 잘하는 영역을 나눠 현지 시장에 진입하고, 이후 확보한 네트워크를 활용해 다른 시장까지 사업 기회를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테크 상감은 단순한 비즈니스 교환이 아니라 협력적 문제 해결에 관한 것입니다. 한국의 세계적인 기술 정밀성과 인도 시장의 대규모 수요를 연결해 상업적 확장이 지역사회의 변화와 함께 갈 수 있는 국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한국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인도 현장에서 검증하고 실제 적용까지 지원하는 실증·기술교류(PoC)와 한국 기업의 기술을 현지 파트너 및 산업 조직과 사업화하는 지식재산 인라이선싱(IP In-Licensing)을 진행한다. 여기에 기술을 이해하고 직접 영업할 현지 인재를 육성하는 ‘테크 마르와리(Tech Marwari)’를 더했다.
마르와리는 인도에서 상업과 비즈니스에 강한 것으로 알려진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테크 마르와리는 IIT 등 공과대학 출신이나 한국어 전공자를 대상으로 한국의 기업문화와 기술, 영업 방식을 교육해 한국 기업의 기술을 현지 기업에 설명하고 거래까지 담당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운다. 통역이나 현지 코디네이터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기술과 시장을 함께 이해하는 영업 인력을 확보해 한국 기업의 현지 사업 과정에 투입한다.
1기에는 델타엑스, 비주얼캠프, 유디임팩트, 서울랩스, 링키스가 참여했으며 비접촉 안구추적 기술을 활용해 문해력과 인지를 진단하는 비주얼캠프부터 금융포용 플랫폼 슈퍼월렛을 개발하는 서울랩스까지 서로 다른 분야의 기술 기업이 인도 시장에서 사업 가능성을 검증하고 있다.
이 과정에는 유니콘인큐베이터가 지난 9년간 확보한 현지 네트워크도 활용한다. 인도에서는 IIT 칸푸르·델리·조드푸르·로파를 비롯해 FICCI와 CII 등 주요 경제단체와 협력하고, 한국에서는 무역협회와 벤처기업협회, 창업진흥원 등을 통해 기업을 발굴해왔다. 2025년에는 주한 인도 대사관이 배석한 가운데 IIT 델리·타밀나두와 교류협력 MoU를 체결했으며, 2026년 4월 대통령 국빈방문에 맞춰 열린 한-인도 비즈니스 포럼에도 참여했다.
인도의 인재를 활용할 때도 단순히 낮은 인건비를 장점으로 보는 접근과는 거리를 둔다.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의 개발자 여러 명을 채용하면 이들을 관리할 인력이 다시 필요하고, 원격 환경에서 신입 인력을 교육하며 품질을 관리하는 비용도 발생한다. 김 대표는 오히려 기술 전문성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춘 고급 인재를 찾아 한국 기업과 함께 일하게 하는 쪽에 주목하고 있으며, 기업과 기술, 현지 인재를 매칭하는 AI 시스템도 개발해 향후 2~3년 안에 온라인 플랫폼으로 구축할 계획이다.
김 대표가 테크 상감에서 강조하는 ‘현지의 사람이 직접 사업을 만들어가는 구조’에는 그가 오랫동안 인도에서 경험해온 현실이 반영됐다. 15년 전 마하라슈트라의 시골 마을에서 철분제를 나눠주며 일시적인 지원만으로는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모습을 봤고, 이후에도 현지에서 사람들의 생계와 일자리 문제를 접했다. 지금은 한국의 기술과 인도의 인재가 각자의 강점을 활용해 함께 사업을 만들고 소득과 일자리를 만들어가는 방법을 테크 상감을 통해 시도하고 있다.
인도 주요 회의에 참석한 유니콘인큐베이터 김진아 대표
한류가 열어준 시장…“이제 한국부터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지난 9년 동안 인도에서 사업을 해온 김 대표가 체감한 변화 중에는 한국을 바라보는 현지의 시선도 있었다. 코로나19 이전만 해도 한국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뚜렷한 이미지가 없는 나라에 가까워 현지 파트너를 만나면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부터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코로나19로 도시 간 이동이 제한되고 온라인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면서 K팝과 한국 콘텐츠가 빠르게 퍼졌고,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국에 대한 인지도도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김 대표가 “인도에서는 BTS를 모르면 부모 자격이 없다고 할 정도”라고 표현할 만큼 한류가 일상 깊숙이 들어오는 동안 인도의 생활과 소비 환경도 함께 변했다. QR 결제와 핀테크가 빠르게 확산됐고 중산층의 소비가 커졌으며, 특히 30대 여성의 IT 산업 진출과 소비가 눈에 띄게 늘어나는 모습도 현장에서 지켜봤다. 코로나19를 전후해 디지털 환경과 소비층이 달라지고 한국에 대한 관심까지 높아지면서 현지에서 한국 기업을 소개하는 방식도 자연스럽게 달라졌다.
과거에는 현지 파트너와 만나 한국이라는 국가부터 설명한 뒤 기업과 제품을 소개해야 했다면 이제는 K팝과 한국 콘텐츠, 삼성과 기아, 롯데 초코파이 같은 기업과 제품이 이미 그 역할을 상당 부분 하고 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친밀감이 형성된 상태에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어 기업의 기술과 제품, 실제 사업에 대한 이야기로 훨씬 빠르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김 대표가 현장에서 체감하는 가장 큰 차이다.
14억 인구보다 정책을 보라
앞으로 인도 시장을 바라볼 때 김 대표가 강조하는 것은 인구보다 정책이다. 해외 기업을 유치해 일자리를 만들고 제조기업과 스타트업을 육성하려는 인도의 방향을 읽으면 한국 기업이 들어갈 수 있는 산업도 보다 구체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반도체와 항공우주, 위성을 비롯한 전략 산업에 투자가 집중되는 가운데 AI 시대의 제조 경쟁력과 연결되는 피지컬 AI와 산업용 로봇 등도 한국 기업이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로 꼽았다.
무엇보다 인도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소비시장으로 보고 직접 공략하려는 접근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주마다 다른 산업과 정책을 파악하고 현지 기업과 인재가 가진 네트워크를 활용하면서 한국은 기술과 사업 구조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도의 인구보다 정책을 많이 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인도 시장을 모두 가져오려고 하기보다 플랫폼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하면 그 위에서 움직일 사람은 인도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9년 동안 60여 개 기업을 인도로 데려간 경험에서 김 대표가 찾은 해법도 결국 여기에 모인다. 한국 기업이 모든 것을 직접 하려 하기보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기술에 집중하고, 현지 시장을 이해하는 기업과 인재에게 영업과 확장을 맡기며 서로의 강점을 결합하는 것이다.
15년 전 인도의 작은 마을에서 김 대표가 고민했던 것도 결국 지속 가능한 방법이었다. 철분제를 계속 가져다주는 대신 스스로 소득을 만들 수 있는 구조를 고민했던 경험은 한국 기술과 인도의 사람을 연결하는 ‘테크 상감’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기술을 인도에 파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현지의 기업과 사람이 직접 움직이고 확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 김진아 대표가 9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시작한 새로운 인도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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