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공지능(AI)이 금융과 제조, 의료 산업 전반을 재편하는 가운데 부동산 산업 역시 조용한 변화를 맞고 있다. 그동안 부동산 플랫폼의 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매물을 확보하고 얼마나 많은 이용자를 모았는지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AI가 시장 분석과 가치평가 영역까지 침투하면서 경쟁의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정보를 보여주는 능력이 아니다. 누가 더 오랫동안 데이터를 축적했고, 얼마나 정교하게 현실을 해석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데이터를 AI가 학습 가능한 구조로 만들었는지가 새로운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미국 프롭테크 시장에서 나타나는 애텀(ATTOM)과 질로우(Zillow)의 변화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표면적으로는 AI 기술 도입 사례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부동산 산업 전체가 ‘검색 플랫폼 중심 시장’에서 ‘AI 기반 데이터 인프라 시장’으로 이동하는 거대한 전환이 진행되고 있다.
최근 미국 프롭테크 시장에서 ATTOM과 Zillow가 보여주는 변화는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표면적으로는 각각 AI 기반 가치평가(AVM) 고도화와 AI 플랫폼 전략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부동산 산업 전체가 ‘검색 중심 시장’에서 ‘AI 기반 데이터 인프라 시장’으로 전환 중이라는 신호다. (자료 출처: AI 생성 이미지)
“얼마에 거래됐나”에서 “왜 움직였나”로
부동산 가치평가의 핵심 도구인 자동가치산정모델(AVM·Automated Valuation Model)은 오랫동안 비교 사례 중심으로 작동해 왔다.  인근 지역에서 최근 거래된 유사 매물을 찾아 가격을 산정하는 방식이다. 거래가 활발한 시장에서는 높은 정확도를 보였지만 거래량이 급감하거나 시장 환경이 빠르게 변하는 시기에는 신뢰도가 크게 떨어지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비교할 거래 사례 자체가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미국 부동산 데이터 기업 애텀은 최근 이러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AI 기반 차세대 AVM을 공개했다. 핵심은 비교 사례를 더 많이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30년 이상 축적된 거래 데이터와 세금, 등기, 모기지(Mortgage), 인구 구조, 입지 특성, 자연재해 위험, 지역 경제 데이터 등을 AI가 장기적으로 학습하도록 설계를 전환했다.
즉 “최근 얼마에 거래됐는가”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왜 특정 지역의 가격이 움직였는가”를 AI가 이해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는 부동산 가치평가가 거래 사례 중심 산업에서 패턴 분석 중심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조인혜 한국프롭테크포럼 처장은 “AI는 단순히 특정 자산의 가격만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금리 환경과 지역 수요 변화, 입지 특성, 과거 가격 흐름, 시장 심리까지 연결해 현재 가치를 추정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애텀의 변화가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평가 정확도가 높아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금융기관과 투자사, 보험사 입장에서는 부동산 가치평가가 곧 리스크 관리의 출발점이 된다. 앞으로는 AI가 시장 변화와 위험 신호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투자 판단과 대출 심사, 자산 운용 과정에 직접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모기지 심사와 자산관리, 기관투자자의 포트폴리오 운용 과정에서 AI 기반 가치평가 활용도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향후 AVM이 단순 시세 조회 서비스를 넘어 금융 의사결정 인프라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애텀은 미국 내 약 1억6천만 건 이상의 부동산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 인구의 99%를 커버하는 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했다고 밝히고 있다. AI 시대의 경쟁력이 알고리즘 자체보다 데이터 축적 능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미국 전역의 부동산(주택·상업) 데이터를 제공하는 애텀 데이터 솔루션즈(Attom Data Solutions) 기업 홈페이지 캡처
질로우의 진화…검색 플랫폼에서 거래 운영체제로
이 변화는 가치평가에만 머물지 않는다. 미국 최대 부동산 플랫폼 질로우 역시 AI를 앞세워 사업 모델 자체를 바꾸고 있다.
과거 질로우는 대표적인 부동산 검색 플랫폼이었다. 사용자가 매물을 찾고 시세를 확인하는 것이 주요 역할이었다. 하지만 최근 질로우가 내세우는 전략은 ‘하우징 슈퍼앱(Housing Super App)’이다. 집을 찾고, 대출을 비교하고, 중개인을 연결하고, 계약을 체결하는 전 과정을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처리하는 구조다. 검색 서비스에서 거래 운영체제(Operation System)로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AI는 단순 추천 기능을 넘어 플랫폼 운영의 핵심 엔진 역할을 수행한다. 생성형 AI(Generative AI) 기반 검색과 추천, 가상 스테이징(Virtual Staging), 3D 투어(3D Tour), 고객 상담 자동화, 계약 프로세스 지원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중개인의 업무 방식도 바꾸고 있다. 고객 응대와 리드 관리, 마케팅, 계약 준비 과정 일부를 AI가 수행하면서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과거 질로우가 사용자가 집을 찾기 위해 방문하는 플랫폼이었다면, 지금의 질로우는 부동산 거래 과정 전체를 플랫폼 안으로 흡수하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시장 상황은 이 전략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미국 주택 시장은 고금리 영향으로 거래량 감소가 장기화되고 있다. 전통적인 플랫폼 기업이라면 실적 악화를 피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럼에도 질로우는 2026년 1분기 매출 7억8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전년 대비 18% 성장했다. 시장은 이를 단순한 실적 개선보다 AI 기반 거래 연결 플랫폼 전략이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미국 질로우 그룹(Zillow Group, Inc.) 건물 전경 (사진 출처: 위키트리)
국내 시장도 결국 데이터 경쟁으로 간다
국내 시장 역시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직 미국처럼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대규모 데이터 인프라가 형성된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오히려 데이터의 양보다 품질과 검증 역량이 더 중요해질 가능성이 높다.
국내에서는 알스퀘어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알스퀘어는 상업용 부동산 시장에서 임대차와 거래, 빌딩, 테넌트, 운영 데이터를 장기간 축적하며 알스퀘어 애널리틱스(RA·RSQUARE Analytics)를 중심으로 데이터 분석 역량을 강화해 왔다. 단순 매물 정보 제공이 아니라 현장 조사와 실거래 데이터를 결합해 상업용 부동산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구조다. 이는 AI 시대의 프롭테크 경쟁이 단순 플랫폼 경쟁이 아니라 데이터 검증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동산은 금융상품처럼 숫자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입지와 유동인구, 임차인 구성, 공실률, 건물 운영 효율, 상권 변화 등 비정형 데이터가 가치에 큰 영향을 미친다. 결국 AI 역시 현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학습할 수 있는지가 경쟁력이 된다.
업계에서는 앞으로 프롭테크 기업의 경쟁이 플랫폼 이용자 수보다 데이터 확보 능력과 검증 역량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그동안 국내 프롭테크 기업들이 매물 정보와 중개 연결 서비스에 집중해 왔다면 앞으로는 투자 판단과 입지 분석, 공실 예측, 자산 가치 분석까지 제공하는 데이터 기업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건물이 아니라 데이터를 짓는 시대
부동산 산업은 오랫동안 물리적 자산의 산업이었다. 좋은 입지와 좋은 건물을 확보하는 것이 곧 경쟁력이었고, 시장의 가치는 눈에 보이는 공간과 자산 규모로 설명됐다. 하지만 AI 시대가 열리면서 새로운 자산이 부상하고 있다. 바로 데이터다.
애텀이 가치평가 모델을 다시 설계하고, 질로우가 검색 플랫폼에서 거래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다. 이제 부동산은 단순히 건물을 사고파는 산업이 아니라 건물을 둘러싼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산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박종열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 교수는 “중요한 질문은 AI가 사람을 대체하느냐가 아니다”라며 “누가 더 깊고 오래된 데이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현실과 연결해 해석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부동산 산업의 미래 경쟁력은 건물 자체가 아니라 데이터를 얼마나 축적하고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이제 부동산 산업은 물리적 공간 위가 아니라 데이터 위에서 다시 설계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생성형 AI가 콘텐츠 산업의 문법을 바꿨듯, AI 기반 가치평가는 부동산 산업의 문법 자체를 바꾸고 있다. 앞으로 소비자는 단순히 매물을 검색하는 데 그치지 않고, AI가 분석한 가치와 위험, 수익성, 미래 성장 가능성까지 함께 검토하며 의사결정을 내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 과정에서 승자는 가장 많은 매물을 확보한 기업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가장 오랫동안 데이터를 축적해 왔고, 그 데이터를 현실과 연결해 시장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기업이 새로운 주도권을 쥘 가능성이 크다.
결국 AI 시대의 부동산 경쟁은 누가 더 많은 건물을 보유했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은 현실을 데이터로 축적하고 이를 더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느냐의 경쟁으로 바뀌고 있다. 부동산의 미래는 더 이상 지도 위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데이터 안에서 새롭게 설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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