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까지 잘 찾아가는 것만으로는 현장에서 로봇의 일이 끝나지 않았다. 배달 로봇은 도착한 뒤 물건을 전달해야 했고, 순찰 로봇은 정해진 경로를 도는 데서 더 나아가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필요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자율주행 로봇으로 사업을 시작한 뉴빌리티가 이동 이후의 문제를 풀기 위해 ‘손’을 붙인 이유다. 이동과 조작을 하나의 업무 흐름으로 연결한 하이브리드 휴머노이드 ‘빌리(Billi)’가 그 첫 결과물이다.
뉴빌리티는 29일 ‘Billi The First Look’ 미디어 프리뷰를 열고 빌리를 처음 공개했다. 빌리는 두 다리로 걷는 전형적인 휴머노이드 대신 휠 기반 하체에 두 팔과 손, 높낮이 조절과 360도 회전이 가능한 상체를 결합했다. 사람과 닮은 형태 자체보다 실제 사람이 일하는 공간에서 빠르게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능을 선택했다.
강기혁 뉴빌리티 대표는 이날 “저희가 풀고 싶은 문제는 휴머노이드 그 자체가 아니다”며 “사람이 일하는 공간에서 이동과 조작을 연결해 제조·물류와 같은 실제 임무를 수행하는 로봇을 지향한다”고 밝혔다.
뉴빌리티 강기혁 대표
뉴빌리티가 빌리 개발에 활용하는 기반은 자율주행 로봇 ‘뉴비(Neubi)’를 실제 서비스 현장에 투입하며 쌓은 경험이다. 국내외 150곳 이상의 현장에서 400대 규모의 로봇을 생산·배치했고 누적 자율주행 거리는 14만km를 넘어섰다. 현재 운영 규모를 기준으로 회사가 보수적으로 환산한 시각·공간 인지 데이터는 연간 약 1억4500만건이다. 단순한 주행 기록보다는 사람과 차량, 노면, 장애물, 공간 구조, 경로 변화와 예외 상황을 실제 업무 과정에서 접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주행 데이터가 곧바로 로봇의 조작 능력으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뉴빌리티도 이를 분명히 했다. 대신 물건을 집는 작업 역시 대상과 주변 공간의 관계를 이해하고 어느 위치까지 접근해야 하는지 판단한 뒤 적절한 자세를 확보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기존 공간지능을 조작의 기반으로 활용한다. 별도의 조작 데이터를 더해 하나의 추론 모델로 학습시키는 방향이다. 성수에 구축한 센터에서도 몸과 손의 다양한 작업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으며, 향후 실제 PoC 현장에서 작업별 데이터를 추가해 모델을 고도화할 예정이다.
잘 움직이는 로봇에서 ‘일을 끝내는 로봇’으로
빌리가 작업하는 과정은 인식과 판단, 실행이 연결된다. 작업 장소에 도착하면 자신의 위치와 자세, 주변 공간과 물체를 먼저 파악한다. 이어 어떤 방식과 순서로 작업할지 결정하고 팔과 손, 몸을 움직인다. 뉴빌리티는 이를 퍼셉션(Perception)·디시전(Decision)·컨트롤(Control)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정해진 동작 하나를 반복하는 대신 여러 ‘스킬셋’을 작업에 맞게 조합해 하나의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핵심은 이동과 조작을 분리하지 않는 데 있다. 물건을 집는 기능이 아무리 정교해도 로봇이 잘못된 위치에 서거나 잘못된 각도로 접근하면 작업은 실패한다. 먼저 이동해 작업에 적합한 위치와 자세를 확보하고, 인식한 정보를 바탕으로 물건을 집어 운반해야 한다. 작업에 실패했을 때도 결과를 확인하고 자세나 행동을 조정한 뒤 다음 동작을 결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뉴빌리티는 성공 사례뿐 아니라 예상과 다른 상황과 실패 사례까지 현장에서 데이터로 축적한다.
이 같은 접근은 기존 자동화 설비 사이에 남아 있는 사람의 업무를 겨냥한다. 물류센터나 제조 현장에서는 AMR이 물건을 운반하고 고정형 로봇팔이 특정 공정을 자동화하더라도 서로 다른 공정과 공정 사이를 사람이 연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빌리는 한 자리에 고정돼 같은 동작을 반복하기보다 이동과 접근, 조작, 운반을 하나의 작업 시나리오 안에서 처리하는 방식으로 이 구간에 들어간다.
현장에서 겪었던 구체적인 문제도 빌리의 형태에 반영됐다. 뉴비를 운영하면서 반복적으로 마주한 문제 중 하나가 엘리베이터였다. 브랜드마다 프로토콜과 연동 조건이 달라 새로운 현장에 들어갈 때마다 별도 구축이 필요했다. 빌리가 직접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탑승할 수 있다면 소프트웨어 연동에 의존하지 않고 층간 이동을 이어갈 수 있다.
현재 빌리의 직접 조작 페이로드는 15kg 미만으로 설정돼 있다. 물건을 적재함에 넣어 이동하는 경우에는 최대 60kg까지 운반할 수 있다. 한 번 가동하면 작업 조건에 따라 약 4~6시간 업무 수행이 가능하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하이브리드 휴머노이드 빌리가 기술 시연을 하고 있다.
사람의 30~40%에서 시작해 80~95%까지…현장에서 성능 높인다
뉴빌리티는 완성된 범용 휴머노이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현장에 먼저 투입해 필요한 능력을 단계적으로 학습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PoC는 버티컬별로 수개월 동안 진행되며 기본 동작의 강화학습·모방학습 이후 실제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예외 상황을 학습한다.
성능 검증도 단계적으로 이뤄진다. 뉴빌리티는 상용화까지 총 4개 스테이지를 두고 초기 단계에서는 사람 기준 30~40% 수준의 KPI 달성을 시작점으로 삼는다. 이후 단계마다 성능을 높여 마지막 단계에서는 사람 대비 80~95% 수준을 목표로 한다. 작업 내용과 이동 여부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는 만큼 단순히 시간당 처리하는 박스 수처럼 하나의 수치로 성능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현재 식품 제조, 정밀 제조, 물류, 대규모 교통 복합단지 등 4개 분야에서 PoC가 예정돼 있다. 회사는 각 현장에서 작업 데이터를 확보해 상용화 수준까지 성능을 높인 뒤 같은 버티컬의 다른 기업으로 적용 범위를 확장한다. 단기적으로는 수십~수백대 규모의 빌리를 현장에 배치한다는 목표도 공개했다.
대형 식품 제조사와 진행하는 PoC의 경우 연내 빌리 1대로 작업 가능성을 검증하는 단계까지 진행할 예정이다. 이후 현장별 요구 수준에 맞춰 성능을 높인다. 보도자료에서도 올해 하반기 대형 식음료 제조, 물류·유통, 대규모 교통 복합시설 분야에서 기술실증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빌리가 처음부터 두 발로 걷는 휴머노이드가 아닌 휠 기반으로 나온 배경에도 상용화 우선 전략이 있다. 실내외를 모두 이동하면서 빠르고 안정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구동형 하체를 채택했고, 사람이 사용하는 선반과 작업대에 대응하도록 두 팔과 두 손,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상체 구조를 더했다. 작업 후 물건을 옮길 수 있도록 모듈형 적재부도 결합할 수 있다. 뉴빌리티는 향후 필요성이 커지는 시점에는 이족보행 형태도 개발할 계획이지만 현재 사업 현장에서는 휠 기반 구조가 더 실용적이라고 판단했다.
강 대표는 “모든 기술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현장에서 가장 빠르게 일을 하게 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기능과 스킬셋을 고도화하는 것이 뉴빌리티가 빌리를 상용화하는 방식”이라고 밝혔다. 뉴비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풀었다면 빌리는 도착한 뒤 ‘무엇을 할 것인가’까지 로봇의 업무 범위를 넓히는 첫 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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