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건축물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연기와 열은 어디로 퍼지고,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빨리 대피할 수 있을까. 건축물의 화재 안전성을 검토하려면 다양한 조건을 설정해 화재와 피난 상황을 반복적으로 계산해야 한다. 문제는 한 번의 시뮬레이션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건축 도면을 분석용 모델로 옮기는 작업부터 해석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까지 숙련된 인력의 손을 거쳐야 하고, 설계가 바뀌면 같은 작업을 다시 수행해야 한다.
김지태 메테오시뮬레이션 대표는 이러한 비효율을 연구 현장에서 오랫동안 경험했다. 화재 시뮬레이션이 안전한 건축물을 설계하기 위한 도구라면, 계산 속도가 느리고 사용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검토할 수 있는 상황이 제한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기존 프로그램의 화면을 개선하는 대신 계산 엔진 자체를 새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메테오시뮬레이션이 자체 개발한 화재·피난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 ‘BUL(불씨)’는 그래픽처리장치(GPU)를 활용해 화재 해석 속도를 높인 것이 특징이다. 특정 시험 조건에서 기존 CPU 기반 해석 대비 최대 107배 빠른 계산 결과를 기록했으며,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도면 인식과 모델 구성 기능도 결합했다.
속도 차이는 실제 프로젝트에서도 확인됐다. 한 연구기관의 배터리·화재 실험 장비 설계 과정에서 통상 2개월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됐던 시뮬레이션 작업을 5일 만에 마무리한 것이다. 단순히 계산 시간을 단축한 성과를 넘어 같은 기간에 더 많은 설계 조건을 검토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화재 안전을 검토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면 여러 설계안을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계산이 빨라지면 같은 시간에도 더 다양한 상황을 살펴볼 수 있죠.”
김 대표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화재 시뮬레이션을 특별한 연구나 인허가 과정에서만 사용하는 기술이 아니라, 건축물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활용할 수 있는 도구로 바꾸는 일이다.
김지태 메테오시뮬레이션 대표가 화재·피난 시뮬레이션 기술의 상용화 성과와 사업 확장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회사는 건설사와 제조업체 등을 대상으로 기술 적용을 확대하고 있다.
연구실에서 느낀 불편함, 화재 해석 엔진 개발로 이어지다
1985년생인 김 대표는 충남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중앙대학교에서 열·유체 분야 석사와 화재·전산유체역학(CFD) 분야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4년부터 터널과 지하공간 화재, 전기차와 배터리 화재안전 등을 연구해 왔으며 현재 우석대학교 소방방재학과 겸임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창업의 계기는 연구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던 화재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었다. 연구자에게는 익숙한 도구였지만 사용법이 복잡하고 해석 시간이 길어 새로운 조건을 적용할 때마다 적지 않은 부담이 따랐다.
“연구실에서 많이 쓰면서도 불편했던 것이 화재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었어요. 다른 분야에 비해 발전이 더디고 사용하기 어려웠죠.”
화재 해석 분야에서는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가 개발한 FDS(Fire Dynamics Simulator)가 널리 사용된다. 화재로 발생하는 열과 연기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소프트웨어지만, 입력 파일과 명령어를 다루는 데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 김 대표는 해외 상용 프로그램 가운데 상당수가 FDS에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결합한 형태여서 계산 속도 자체를 개선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2016년 개인사업자로 연구용역을 시작한 그는 2023년 법인을 설립하고 독자적인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섰다. 기존 FDS의 물리 모델을 바탕으로 GPU에서 구동하는 해석 엔진을 직접 구현한 것이 BUL의 핵심이다.
CPU 기반으로 계산하던 작업을 GPU의 병렬처리 구조에 맞춰 구현하면서 속도를 끌어올렸다. 회사 측 시험 결과 RTX 5060 환경에서는 기존 CPU 기반 FDS 대비 15~33배, RTX 4090 환경에서는 최대 107배 빠른 계산 속도를 기록했다. 다만 이는 특정 시험 모델과 하드웨어 조건에서 측정한 결과로, 모든 해석 환경에서 동일한 성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계산 속도를 높이는 것만큼 중요한 과제는 기존 소방설계 업무와의 호환성이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기 위해 설계사가 기존 작업 방식을 모두 바꿔야 한다면 현장에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BUL는 기존 FDS 입력 파일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하나의 프로그램에서 자체 GPU 엔진과 표준 FDS를 선택해 실행할 수 있으며, 설계 초기에는 빠른 GPU 해석으로 여러 조건을 비교하고 인허가 제출을 위한 해석에는 표준 FDS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표준 FDS 자체를 수정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계산 기술을 적용하도록 했다.
AI도 해석 결과를 대신 만드는 용도가 아니다. 건축 도면을 인식하거나 사용자의 작업 지시를 입력값으로 변환하는 등 모델링 과정을 지원한다. 실제 화재 현상에 대한 계산은 물리 기반 해석 엔진이 수행한다는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메테오시뮬레이션의 화재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 ‘BUL:C(불씨)’의 AI 자동화 기능 화면. 소방 전문지식 기반 RAG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CAD 도면 인식부터 화재 해석 모델 구성, 법규 준수 보고서 생성까지 지원한다. (자료 제공: 메테오시뮬레이션)
현재 배포 중인 0.9x 버전에는 AI 챗봇과 63종의 재료 물성치 라이브러리를 탑재했다. 사용자가 일상적인 언어로 작업을 지시하거나 건축 도면을 입력하면 화재 해석 모델 구성을 지원하며, 반복적으로 입력해야 했던 재료 정보를 손쉽게 불러와 설정 오류도 줄일 수 있다. 차기 버전인 BUL 2.0에서는 건축정보모델링(BIM)과의 호환성을 정식 지원해 설계에 사용한 BIM 모델을 화재 해석용으로 변환하는 기능을 추가한다. 건축 도면을 해석용 모델로 다시 작성하는 수작업을 줄여 설계와 화재 안전 검토의 연계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다만 계산 속도의 향상이 곧 해석 결과의 정확성을 의미하지는 않는 만큼, 메테오시뮬레이션은 성능 개선과 함께 신뢰성 검증에도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메테오시뮬레이션은 ISO 9705 실내 화재 시험을 대상으로 BUL와 표준 FDS의 결과를 비교했다. 회사 측에 따르면 공간 분포를 기준으로 96.6~98.8%의 일치도를 확인했으며, 일부 특수 환경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줄이기 위한 개선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빠르다는 것보다 맞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쓰고 있습니다.”
화재 안전은 계산 결과가 실제 설계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분야다. 김 대표에게 속도 향상은 기술적 성과이지만,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되려면 결과의 신뢰성을 확보하는 일이 먼저다.
GS건설 유료 계약으로 상용화 첫발…다음 과제는 소프트웨어 매출
연구실에서 개발한 기술이 실제 건설 현장으로 이어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다. 메테오시뮬레이션은 2025년 7월 GS건설과 초고층 공동주택 화재안전 성능설계 기술협약을 체결했고, 한 달 뒤 유료 용역 계약으로 연결했다.
당시 화재 해석 결과를 3차원으로 확인할 수 있는 뷰어 시제품을 납품했으며, 올해에는 성수전략정비구역 제1지구 재개발과 관련한 후속 협약도 맺었다. 연구개발 단계의 기술이 건설사의 실제 사업에 적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사례다.
제조업 분야에서도 수요를 확보하고 있다. 삼성전자에는 전기차 비중이 높아진 지하주차장의 화재 대응을 위한 엔지니어링 서비스를 제공했고, 한국배터리산업협회의 사용후 배터리 열폭주 시뮬레이션 용역도 수행 중이다.
다만 현재 메테오시뮬레이션의 주요 수익원은 소프트웨어 판매보다 엔지니어링 용역이다. 2026년 10월 기준 BUL의 소프트웨어 라이선스 도입은 5건이며, 연간 구독료는 600만원이다. 구독 사업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아 계약 갱신이나 장기적인 고객 유지 성과를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김지태 메테오시뮬레이션 대표가 GPU 기반 화재 해석 기술의 특징과 계산 속도 개선 성과를 소개하고 있다.
김 대표를 포함한 임직원 5명 전원이 연구개발 인력으로 구성된 메테오시뮬레이션은 2025년 첫 영업이익을 기록한 데 이어 올해 7월 투자 계약을 체결하고 9월 중소벤처기업부 팁스(TIPS)에 선정되며 기술 개발과 사업 확장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김 대표가 현재 가장 필요한 자원으로 꼽는 것은 판로로, 건설사와 제조업체 등 실제 설계 현장에서 화재 해석 기술의 활용도를 높이고 엔지니어링 용역에 집중된 수익구조를 소프트웨어 라이선스 판매와 구독 매출 중심으로 다변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2027년에는 건축정보모델링(BIM) 호환 기능을 갖춘 차세대 소프트웨어 BUL 2.0을 출시하고, 국내에서 축적한 기술 개발 및 현장 적용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시장 진출도 추진할 예정이다. 장기적으로는 화재와 피난에 집중된 해석 범위를 스프링클러 작동, 구조해석, 홍수와 지진 등 다양한 재난 상황으로 확대해 재난·방재 분야를 아우르는 디지털 트윈 플랫폼으로 발전시킨다는 목표다.
김 대표는 화재 시뮬레이션의 계산 속도가 빨라지고 사용 과정이 간소화되면 건축물의 안전성을 검토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길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시간과 비용의 제약으로 제한된 화재 조건만 분석할 수 있었다면, 앞으로는 건축 설계 초기부터 다양한 시나리오를 반복적으로 검토하고 그 결과를 설계에 반영함으로써 법적 최소 기준을 넘어서는 안전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안전 검토가 빠르고 쉽고 저렴해지면 법적 최소 기준을 넘어 더 안전한 설계를 찾는 일도 가능해집니다.”
메테오시뮬레이션은 계산 속도를 높이는 기술을 확보했고, 건설사와 제조업체의 프로젝트를 통해 현장 적용 경험도 쌓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개별 용역에서 확인한 수요를 반복적인 소프트웨어 사용으로 연결하는 일이다. 두 달 걸리던 작업을 닷새로 줄인 기술이 앞으로는 설계 현장에서 더 많은 화재 상황을 검토하는 데 쓰일 수 있도록, 메테오시뮬레이션은 상용 소프트웨어 기업으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
* 스타트업 생태계 기자단은 KAIA와 벤처스퀘어가 함께 운영하며 스타트업 현장의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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