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인공지능(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자체에서는 글로벌 빅테크에 비해 다소 늦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모델을 활용하는 역량에서는 한국이 세계 1위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미국 AI 영상 생성 플랫폼 힉스필드(Higgsfield)의 김민성 아시아태평양(APAC) 디렉터는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힉스필드가 한국을 아시아 확장의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를 묻자 나온 답이다.
힉스필드는 2023년 설립된 샌프란시스코 기반 스타트업이다. 소셜미디어 기업 스냅에서 생성형 AI를 이끌었던 알렉스 마슈라보프와 에르자트 둘라트가 공동 창업했다. 올해 1월 기업가치 13억 달러를 인정받은 데 이어 8월 시리즈B 투자에서 4억 달러를 유치하며 기업가치가 54억 달러로 높아졌다. 8개월 만에 기업가치가 네 배 이상 상승했으며 이 라운드에는 한국의 미래에셋캐피탈도 참여했다. 회사 발표에 따르면 연환산 매출은 7억 달러, 사용자는 238개국 3000만 명이며 포춘 500대 기업 가운데 390곳이 이 플랫폼을 사용하고 있다.
힉스필드(Higgsfield)의 김민성 아시아태평양(APAC) 디렉터
힉스필드의 특징은 영상 생성 모델을 직접 개발하는 대신 여러 모델을 하나의 플랫폼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는 점이다. 플랫폼에는 바이트댄스의 시댄스, 콰이쇼우의 클링, 오픈AI의 소라, 구글의 Veo 등 영상 모델 7종이 탑재돼 있으며 이미지 모델 4종까지 합치면 11종에 이른다. 특정 모델 하나의 성능을 경쟁력으로 삼기보다 작업에 따라 여러 모델을 선택하고 조합하는 데 사업의 초점을 맞췄다.
올해 상반기 선보인 ‘슈퍼컴퓨터(Supercomputer)’는 이러한 모델 선택 과정을 자동화한 제품이다. 사용자가 대화창에 만들고 싶은 것을 설명하면 에이전트가 작업을 단계별로 나누고 각 단계에 적합한 언어 모델과 이미지 모델, 영상 모델을 선택해 실행한다. 모델 선택 화면에는 개별 모델명 대신 ‘auto’가 표시된다. 슬랙과 피그마, 드라이브, 노션 등 외부 도구와 연동되고 프로젝트 이력을 기억하는 메모리 계층을 둬 같은 브랜드의 작업을 반복할수록 기존 작업의 맥락과 브랜드 톤을 반영할 수 있도록 했다. 광고 파이프라인이나 제품 데모처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작업은 ‘스킬’ 형태로 설치해 활용할 수 있다.
한 커뮤니티 모임에서 발표 중인 힉스필드(Higgsfield)의 김민성 아시아태평양(APAC) 디렉터
시장 규모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그랜드뷰리서치는 올해 AI 영상 생성기 시장 규모를 9억4600만 달러로 추산했다. 편집과 워크플로 도구까지 포함하면 메티큘러스리서치 기준 36억7000만 달러이며 2036년에는 248억9000만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힉스필드 한 회사의 연환산 매출이 좁은 범위로 정의한 AI 영상 생성기 시장 전체 규모와 맞먹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AI 영상 시장을 어디까지 포함해 계산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도 아직 정리되는 과정에 있다.
한국 시장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지난 6월 국내 광고·마케팅 그룹 FSN과 계열사 부스터즈, 애드쿠아가 힉스필드 엔터프라이즈 솔루션을 도입했으며 8월 코엑스에서 열린 AI 서밋에도 참가했다. 김 디렉터는 이보다 앞선 지난 5월 서울에 부임했다.
그가 한국을 아시아 첫 거점으로 선택한 배경에는 기술보다 산업 구조가 있다. 그는 “K팝, 드라마, 광고, 웹툰까지 시각 콘텐츠에 의존하는 산업들이 촘촘하게 연결돼 있고, 이 산업들이 이미 글로벌 플랫폼을 겨냥해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며 “해외 진출을 전제로 한 시각 콘텐츠 수요가 원래 높은 나라인데 여기에 생성형 AI가 제작 속도의 병목을 풀어주면서 채택이 급격히 빨라졌다”고 말했다.
기업 도입도 특정 업종에 한정되지 않는다. 김 디렉터는 “게임, 전자, 커머스, 콘텐츠 제작 스튜디오, 패션까지 계약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며 “최근에는 컴플라이언스와 법무 검토까지 필요한 대기업급 문의가 늘고 있는데, 시장이 얼리어답터의 실험에서 대기업의 정식 도입 검토로 단계가 넘어가고 있다는 신호로 본다”고 말했다. 개인 크리에이터 중심으로 성장했던 생성형 AI 영상 시장에서 엔터프라이즈 매출 비중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는 것이 그가 주목하는 한국 시장의 변화다.
기업 수요를 겨냥한 제품이 ‘마케팅 스튜디오(Marketing Studio)’다. 리테일이나 아마존의 제품 페이지 주소를 붙여 넣으면 광고 영상과 이커머스 소재, 사용자 제작 콘텐츠(UGC) 형식의 리뷰 영상을 생성한다. 회사는 이 기능이 공개 첫 30일 동안 마케터 6만8000명을 모았다고 밝혔다. 6월에는 엔비디아의 에이전트 툴킷을 기반으로 한 슈퍼컴퓨터 2.0을 내놓으며 TV 광고와 제품 릴, 아마존 리스팅, AI 팟캐스트 등 20종이 넘는 제작 파이프라인을 추가했다. 기획부터 제작과 게시, 성과 최적화까지 마케팅 전 과정을 하나의 대화창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대기업 도입을 고려해 데이터 유출을 걸러내는 정책 가드레일과 에이전트 권한 제어 기능도 포함했다. 회사는 현재 6개 대륙 1만2000여 개 기업이 플랫폼을 사용하고 있으며 전체 활동의 70%가 상업 광고라고 밝혔다.
힉스필드 홈페이지에 소개된 ‘마케팅 스튜디오(Marketing Studio)’ 화면 (출처: 힉스필드)
김 디렉터의 이력은 광고를 만드는 영역보다 광고의 성과를 측정하고 분석하는 분야에 가깝다. 모바일 앱 트래킹 기업 튠에서 시작해 오페라 미디어웍스(현 애드콜로니)와 마케팅 애널리틱스 기업 싱귤러를 거쳤고, 국내 애드옵스 기업 아드리엘에서는 부대표를 지냈다. 15년 넘게 마케팅 업계에서 광고 성과 데이터를 다루며 잔뼈가 굵었다.
분석에서 생성으로 영역을 옮긴 이유를 묻자 그는 “측정 데이터를 들여다볼수록 확인하게 된 건 크리에이티브 자체가 성과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라는 사실이었다”며 “성과는 매체 집행이나 타겟팅보다도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에서 갈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힉스필드를 크리에이티브 도구인지 퍼포먼스 수단인지 먼저 규정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툴의 정체성은 회사가 규정하는 게 아니라 고객의 목적이 규정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모델을 직접 만들지 않는 플랫폼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명확한 입장을 내놨다. 김 디렉터는 힉스필드를 ‘오케스트레이터’ 또는 ‘애그리게이터’라고 부른다. 같은 프롬프트를 입력해도 엔진마다 결과가 다르고 최고 성능을 내는 모델도 계속 바뀌기 때문에 어떤 작업에 어떤 모델을 선택하고 조합할 것인지가 하나의 기술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는 “지난해에는 나노 바나나 프로가 대세였고 올해 초는 클링, 지금은 시댄스가 인기”라며 “특정 원 모델사 하나에 고착화되어 있으면 트렌드가 바뀔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편 영상 하나를 제작할 때도 보통 4개 이상의 엔진을 조합해 사용한다고 했다. 슈퍼컴퓨터가 개별 모델명을 감추고 ‘auto’로 처리하는 것도 사용자가 매번 모델의 성능을 비교하고 선택하는 과정을 줄이기 위해서다.
여러 컷과 장면에 걸쳐 캐릭터와 톤을 유지하는 ‘소울(Soul)’ 계열 기능은 힉스필드가 자체적으로 개발한 기술이다. 생성형 AI 영상 제작에서 어려움으로 꼽히는 장면 간 일관성을 높이는 데 활용한다. 한국어와 한국 지식재산(IP)을 배경으로 작성한 프롬프트에서는 한국이라는 맥락을 기본값으로 반영하도록 설계했으며 김 디렉터는 “사용자가 직접 각 엔진을 붙여 쓸 때는 얻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플랫폼이 가진 한계도 인정했다. 김 디렉터는 국내 마테크 솔루션의 강점을 시스템 통합(SI) 방식의 고객 대응에서 찾았다. 엔지니어가 국내에 있어 고객의 요구를 빠르게 제품에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글로벌 플랫폼은 수백 개 국가와 수많은 산업군을 동시에 상대해야 해 구조적으로 표준화된 형태로 갈 수밖에 없다”며 “이게 글로벌 솔루션이 지는 지점이라면 지는 지점이다. 특히 아시아 국가에서는 그렇다”고 말했다. 반대로 이러한 표준화는 국내 솔루션이 갖추기 어려운 확장성과 빠른 모델 업데이트로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힉스필드가 판매하는 것도 개별 엔진의 사용권보다 결과물에 도달하는 시간과 시행착오를 줄여주는 데 있다는 설명이다.
국내 콘텐츠 업계가 관심을 가질 만한 영역도 있다. 힉스필드는 지난해 8월 AI 아이돌 ‘키온(Kion)’을 공개하며 AI 레코드 레이블을 표방했고 올해는 AI 걸그룹 ‘제피어(Zephyr)’도 선보였다. K팝뿐 아니라 버추얼 아이돌 시장이 성장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힉스필드가 콘텐츠 제작 영역까지 직접 진출할 가능성도 제기될 수 있지만 김 디렉터는 이에 선을 그었다.
“K팝이든 영화든 콘텐츠 시장에 직접 진출할 계획도 의향도 없습니다. 키온과 제피어는 이 플랫폼으로 실제로 무엇까지 만들 수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한 자체 실험이자 쇼케이스였고, 상업적 목적을 위한 자체 제작을 계속 이어갈 계획은 없습니다.”
이어 “힉스필드는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플랫폼을 제공하는 회사입니다. 저희의 역할은 이 플랫폼을 활용해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 하는 크리에이터와 제작사를 지원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국내 지식재산(IP) 보유 기업이 힉스필드를 활용할 수 있는 범위는 초상권과 IP 처리 구조에서도 확인된다. 특정 인물이나 IP는 학습과 활용이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으며 기본값은 ‘블락’이다. 다만 해당 IP를 실제로 소유한 기업이라면 권리를 확인한 뒤 해당 기업이 활용할 수 있도록 제한을 해제하는 구조다. 기획사나 웹툰 제작사 등이 보유한 IP를 생성형 AI를 통해 확장하려 할 때 권리 확인을 거쳐 활용할 수 있는 방식이다.
힉스필드를 활용한 AI 콘텐츠 관련 화면 (출처: 유튜브 정마담 화면 캡처)
제피어를 제작하는 데는 5일이 걸렸다. 김 디렉터는 제작 기간 자체보다 짧아진 제작 기간이 콘텐츠 실험의 비용을 낮출 수 있다는 점에 의미를 뒀다. “AI 콘텐츠는 실패해도 되는 비용 구조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투입 기간이 짧으면 실패의 비용도 그만큼 작아집니다”라고 말했다.
다만 제작 속도가 콘텐츠의 완성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5일 만에 만들 수 있다는 건 제작의 병목이 사라졌다는 뜻이지 좋은 콘텐츠가 자동으로 나온다는 뜻은 아니다”며 “모든 콘텐츠에는 결국 서사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생성형 AI가 제작비를 낮추면 기존 콘텐츠 제작 생태계의 수익 구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은 AI 확산으로 디자인 직군의 외주 시장이 축소 국면에 들어섰다고 분석한 바 있다. 김 디렉터 역시 이 문제를 업계가 계속 고민해야 할 지점으로 꼽았다.
그는 “지금까지 영상 제작 시장은 수준 높은 결과물과 생산성이 결국 자본의 논리에 비례하는 구조였다”며 “제작 과정이 간소화돼도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고 그것을 완성하는 역량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라고 말했다. 힉스필드를 기존 제작자를 대체하는 수단보다 제작자가 활용하는 파트너로 정의하면서도 생성형 AI의 확산이 기존 외주 제작 구조를 그대로 유지시키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제작 경쟁의 기준이 누가 더 많은 제작비를 투입할 수 있는지에서 누가 더 좋은 아이디어와 기획을 갖고 있는지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한국 시장에서 풀어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는 규제 대응이다. 한국은 올해 1월 22일 AI 기본법을 시행했으며 생성물 표시 의무도 법에 포함됐다. 현재 힉스필드 플랫폼은 결과물에 AI 생성물임을 알리는 표시를 시스템 차원에서 자동 삽입하지 않는다.
김 디렉터는 “제작물의 활용과 그로 인한 법적 책임은 실제 제작 주체에게 있다는 것이 기본 원칙”이라면서도 “한국 AI 기본법이 요구하는 표시 의무 등 로컬 규제 대응은 검토하고 있고, 필요하다면 한국 시장에 한해 별도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슈퍼컴퓨터 2.0에는 정책 가드레일과 권한 제어 기능이 적용돼 있지만 컴플라이언스 팀을 위한 감사 추적 기능은 출시 시점 기준 로드맵 단계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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