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물건을 팔 때도, 살 때도, 사람을 뽑을 때도, 회사를 사고팔 때도 모든 일은 결국 계약서 한 장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계약이 데이터가 아니라 담당자의 경험과 관행에 기대어 결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같은 조항을 두고도 담당자마다 판단이 다르고, 담당자가 바뀌면 지난 협상의 맥락도 함께 사라집니다. 물어볼 변호사도 마땅치 않아 인터넷에서 내려받은 양식에 회사 이름만 바꿔 도장을 찍는 일이 흔하다 보니, 불리한 조항이 숨어 있거나 갱신 기한이 지나가도 알아차리기 어렵죠. 해외 법인 이사회에 현지인이 꼭 있어야 하는지 같은 간단한 정보 하나를 확인하려고 현지 변호사의 답을 2주씩 기다리기도 합니다.
리걸 AI 기업 BHSN(비에이치에스엔)은 이 답답함을 AI로 풀겠다고 나섰습니다. 2020년 4월 회사를 세운 임정근 대표는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법무법인 율촌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미국 자본이 밀려들던 시절 “M&A야말로 변호사의 꽃”이라는 생각으로 이 길에 들어섰고, 대형 로펌과 해외 고객 중심의 부티크 로펌에서 M&A와 해외 투자, 글로벌 비즈니스 자문을 맡으며 소송이 아닌 자문으로 기업을 상대해 왔습니다. 그래서인지 BHSN도 처음부터 기업이 가장 자주 마주하는 법률 업무인 ‘계약’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계약서 작성부터 검토, 전자서명, 관리까지 계약 업무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고, 사내 자료와 정책을 AI가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로 구조화해 계약을 판단하는 근거로 삼는 방식입니다.
구성원은 34명으로, 기술 조직(AI·백엔드·프론트엔드·데브옵스), 프로덕트 솔루션 조직(디자인·프로덕트), 비즈니스 조직(마케팅·세일즈), 백오피스로 나뉩니다.
사명 BHSN은 ‘The Best and High Skilled Nurturers who Turn Technology into Real Life’의 약자입니다.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해 가는 과정이고 앞으로 더 발전할 거예요. 로봇, AI, 바이오 기술로 세상이 많이 바뀌겠죠. 중요한 건 그 기술이 사람과 사회에 어떤 가치를 주고 어떻게 도움이 되느냐예요. 그래서 기술을 활용해 실질적으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만들자는 의미입니다.”
숨은 뜻도 하나 있습니다. ‘변호사님’의 초성 ‘ㅂㅎㅅㄴ’을 영문으로 옮긴 것이기도 합니다. 해외에서 일하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사장님을 SJN, 전무님을 JMN처럼 초성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 여기서 착안했다고 합니다.
임정근 대표를 만나 BHSN의 핵심가치와 일하는 방식을 들어 봤습니다.
법무팀 없는 회사에도 법무팀을
“AI 기술로 어떻게 가치를 만들 것이냐가 핵심이에요. 저희 차별점은 결국 계약입니다. 계약은 회사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정보 비대칭과 업무 프로세스 문제 때문에 그동안 기업들이 상당히 비효율적으로, 힘들게 계약을 해 왔어요. 전문가들만 가지고 있던 기술과 노하우, 프로세스를 AI로 표준화해서 더 많은 기업이 계약을 효율적으로 체결하고 이행하도록 돕는 게 저희 목표입니다.”
임 대표는 계약을 사회적 격차의 문제로 봅니다.
“자본과 정보, 전문 인력을 가진 대기업과 그렇지 못한 중소기업 사이의 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있어요. 데이터와 AI의 시대가 되면 이 격차는 훨씬 더 커질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저희는 그 답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인 계약에서 찾으려는 거예요.”
법무팀 없는 작은 회사도 계약을 잘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BHSN이 풀려는 숙제입니다. 이 문제의식은 BHSN의 미션으로 이어집니다. BHSN의 미션은 ‘Document AI로 기업의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재정의한다’입니다. 번거롭고 실수가 잦은 비즈니스 리서치와 문서 처리는 AI에 맡기고, 사람은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의사결정에 집중하게 하자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 기업 내부 정보를 AI가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로 만들어 누구나 쉽게 쓰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비전은 ‘아시아를 선도하는 Business Document AI 기업’입니다. 전 세계 기업이 아시아 비즈니스 문서를 더 잘 이해하고 처리하도록 돕겠다는 포부입니다.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려는 해외 기업에게 언어도, 법도, 관행도 다른 현지 계약서는 큰 장벽입니다. 반대로 해외로 나가는 국내 기업은 앞서 본 것처럼 간단한 현지 정보 하나를 확인하려고 몇 주씩 기다리기도 하죠. 해외 투자와 글로벌 비즈니스 자문을 오래 해 온 임 대표가 국내 시장에 머물지 않고 아시아를 무대로 삼은 이유입니다.
몰입·성장·투명·존중
BHSN의 핵심가치는 몰입, 성장, 투명, 존중입니다. 임 대표는 이 가치들의 출발점이 ‘가치 창출’이고, 그 전제가 ‘몰입’이라고 강조합니다.
몰입. 네 가지 가치 가운데 임 대표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몰입이었습니다. 성장도, 투명도, 존중도 결국 가치를 만들기 위한 것이고, 그 가치는 몰입한 순간에 생긴다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개인이든 회사든 사회든, 발전한다는 건 결국 새로운 것을 계속 만들어 내고, 그 새로운 것이 다시 우리를 성장시키는 거예요. 저는 그 과정에서 가치가 생긴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몰입이 전제돼야 합니다. 새로운 놀이를 배우거나 신기한 걸 보거나 처음 연애를 할 때는 딴생각 없이 그 순간 자체가 좋잖아요. 그렇게 빠져드는 게 새로운 경험을 하고 가치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에요. 반대로 정말 하기 싫은데 시험 점수 때문에 억지로 하면 효율도 안 나고 힘만 들죠.”
BHSN이 핵심가치에서 ‘구성원은 모두 프로’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프로란 내가 책임질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문제 해결에 깊이 몰입하는 사람, 주인의식을 갖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며 맡은 일은 끝까지 완수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회사의 몫은 구성원을 감시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빠져들 수 있는 판을 깔아 주는 것이고, 구성원의 몫은 맡은 일을 내 일로 여기고 끝까지 책임지는 것입니다.
성장. 회사의 성장과 개인의 역량 성장을 위해 늘 열린 자세로 변화에 대응하고, 나의 지식과 경험만 믿지 않고 서로의 성장을 독려하고 도우며 원 팀으로 비즈니스를 함께 이끄는 것을 말합니다.
“구성원마다 하고 싶은 게 분명히 있고, 회사는 그걸 잘 맞춰 주려고 노력하죠. 커리어를 어떻게 쌓고 싶어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그 성장이 회사와 어떻게 맞물려야 구성원이 잘하는 일이 곧 회사가 잘되는 일이 되는지를 계속 살펴요. 그렇게 방향을 맞추고 성장할 기회를 꾸준히 주는 데 신경을 씁니다.”
투명. 한발 빠른 공유와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신뢰를 쌓고, 남에게 해가 되는 말과 행동을 삼가며,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일을 감추거나 왜곡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임 대표는 몰입해서 가치를 만들려면 정보를 혼자 쥐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나만 알고 있기 보다는, 정보를 함께 나누고 내가 가려는 방향까지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존중. 서로를 인정하고 각자의 가치를 존중하며, ‘우리는 서로 다를 뿐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명심하고 내가 존중받고 싶은 만큼 다른 사람을 먼저 존중하며 다가서는 것을 말합니다.
“절대적인 답 하나가 있다기보다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봐요. 그 여지를 인정해야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도 존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업무 센스로 뽑고, 자율로 맡긴다
법률, AI, 비즈니스처럼 배경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한 팀으로 묶는지 물었습니다. 임 대표의 답은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스타트업일수록 개개인의 성향과 분위기, 역량이 정말 중요해요. AI 시대에는 더 그렇고요. 예전에는 어떤 스킬과 경험을 가졌는지가 훨씬 중요했지만, 지금은 지식적인 부분을 AI가 많이 도와줄 수 있거든요. 경험이 조금 부족해도 AI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 결국 중요한 건 일의 핵심을 얼마나 빠르게 캐치하느냐예요. 유연성, 혹은 업무 센스라고 할 수 있겠죠.“
한 분야를 오래 파고든 ‘장인’보다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예전에는 프로세스 하나가 5년, 10년씩 갔으니까 장인이 통했죠. 지금은 사회 환경이 너무 빨리 바뀌잖아요. ‘나는 이렇게 해 왔으니까 이게 맞아’가 아니라, 우선순위를 파악해서 빠르게 의사결정하고 실행하는 역량이 더 중요해졌어요. 그래서 전문가를 많이 모으기보다는, 빨리 이해하고 결정하고 협력해서 성과를 낼 수 있는 사람들로 팀을 꾸리려고 합니다.“
채용도 이 기준을 따릅니다. 무엇을 할 줄 아는지보다 어떻게 일하는 사람인지를 먼저 보기 때문에, 첫 관문은 직무 인터뷰가 아니라 컬처 인터뷰입니다. 이어 직무 전문가들과 직무 인터뷰를 하고, 마지막으로 경영진과 최종 인터뷰를 합니다. 포지션에 따라 코딩 테스트 같은 과제 전형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결국 일은 성과로 판단하는 거예요. 감시하고 감독하면 오히려 개인의 역량을 끌어내는 데 방해가 된다고 봐요. 그래서 세부적인 가이드라인이나 규칙을 촘촘하게 만들기보다는, 일하는 방식은 각자에게 맡기고 성과로 이야기하자는 거죠.“
그렇다고 자율에만 맡겨 두는 것은 아닙니다. 자율 속에서도 성과가 나려면 받쳐 주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게 임 대표의 생각입니다.
“사람은 그냥 혼자 놔두면 기본적으로 게을러져요. 굳이 뭘 하기보다 편한 걸 찾는 건 본능 같은 거거든요. 그래서 두 가지가 중요해요.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 그리고 지금 어떤 상황이고 각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최대한 공유해서 서로 생각을 맞추는 것이요. 그러면 굳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신경을 쓰게 됩니다. 결과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구조를 만들고, 성과는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 그 판을 잘 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율은 방임이 아니라, 목표와 공유라는 두 기둥 위에 서 있을 때 제대로 작동합니다.
BHSN이 그리는 회사와 구성원의 관계는 이렇습니다. 회사는 목표와 정보를 투명하게 내놓고, 구성원은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을 이야기하며, 둘이 맞물리는 지점을 함께 찾아갑니다. 그 자리에서 구성원은 몰입하고, 그 몰입은 다시 가치가 됩니다. 임 대표가 바라는 것도 결국 이것입니다. “회사가 가치 있는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서 인정받고, 그게 회사의 성장과 구성원의 성장으로 이어져 서로를 키우는 것. 조직 안에서도 그런 선순환이 잘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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