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경쟁의 승자는 가장 뛰어난 모델을 먼저 개발하는 나라일까. 미국과 중국은 첨단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AI 모델 개발을 놓고 경쟁하고 있지만, 기술적 우위가 곧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확보한 기술을 산업과 군사·사회 시스템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적용하느냐에 따라 국가 간 힘의 균형도 달라질 수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상대국의 기술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불확실성이다. 범용인공지능(AGI)을 먼저 확보한 국가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인식이 강해질수록 기술 경쟁은 상대의 개발을 저지하려는 안보 갈등으로 번질 가능성이 커진다.
태재미래전략연구원이 10월 16일 발간한 『최신 해외 동향』 제56호는 미국 싱크탱크 신미국안보센터(CNAS)의 보고서 『Superpowers and AGI: How U.S.-China Competition Could Be Shaped by the Emergence of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를 토대로 미중 AGI 경쟁이 국제질서에 미칠 영향을 분석했다. CNAS 선임연구원 제이콥 스톡스(Jacob Stokes)가 지난 8월 발표한 보고서로, AGI의 등장이 미중 경쟁의 양상과 국가 간 힘의 균형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가 핵심 주제다.
그동안 미중 AI 경쟁은 누가 더 우수한 AI 모델을 개발하고 첨단 반도체를 확보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AGI가 경제와 군사, 정보 역량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기술 경쟁을 국가안보 차원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강화되고 있다. 상대국이 결정적인 기술 우위를 확보하기 전에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판단이 확산될 경우 경쟁의 수단과 범위 역시 달라질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이 인공지능(AI) 기술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가운데, 범용인공지능(AGI) 개발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군사적 긴장과 안보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출처: AI 생성형 이미지)
AGI 선점이 곧 패권은 아니다…기술을 활용하는 국가 역량이 관건
기술을 확보하는 것과 이를 실제 국가 역량으로 전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AGI를 먼저 개발한 국가가 자동으로 세계 패권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CNAS 보고서는 AGI가 국가 경쟁력에 영향을 미치는 경로를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경제성장과 생산능력의 확대다. AGI가 노동 자동화와 연구개발을 촉진하면 생산성이 향상되고, 이를 통해 확보한 자원을 국방과 외교, 금융, 정보 역량에 투입할 수 있다.
둘째는 글로벌 정보환경에 대한 영향력이다. AI가 개인별로 최적화된 정보와 콘텐츠를 대규모로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게 되면 정보의 확산과 여론 형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셋째는 군사적 활용이다. 사이버 작전과 자율무기, 정보 분석, 군사 지휘통제 등에서 AI가 기존 체계의 작동 방식을 바꿀 가능성이 있다.
반면 AI가 인간의 의도와 다르게 작동하거나 통제 범위를 벗어날 경우 국가적 위험이 커질 수 있으며, 대규모 일자리 대체와 불평등 심화, 정보 혼란에 따른 사회적 갈등도 국가 역량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AGI 개발 성과를 실질적인 국가 경쟁력으로 연결하려면 기술을 사회와 산업 전반에 안정적으로 적용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관리할 수 있는 역량까지 갖춰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미국과 중국의 AI 전략을 비교하는 데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태재미래전략연구원에 따르면 미국은 최첨단 모델의 기술적 돌파에 집중하는 반면, 중국은 기존 AI 기술의 산업 적용과 로봇 등 다양한 발전 경로를 병행하고 있다. 어느 국가가 AGI에 먼저 도달하느냐만으로 양국의 경쟁력을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다.
한국 AI 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AI 모델 개발 능력을 확보하는 것과 제조·물류·의료·로봇 등 산업 현장에서 기술을 실제 생산성과 서비스 경쟁력으로 연결하는 역량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AI 스타트업 역시 모델의 성능뿐 아니라 기술이 적용될 산업과 고객, 실제 해결할 문제를 중심으로 경쟁력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AGI 개발 직전…불확실성이 부르는 충돌 가능성
CNAS 보고서는 미중 AGI 경쟁을 양국 모두 개발을 추진하는 단계, 한 국가가 기술적 임계점에 접근하는 단계, 한 국가가 독점하는 단계, 양국 모두 확보하는 단계로 구분하고, 이 가운데 상대국이 AGI 개발의 임계점에 근접했다고 판단하는 시기를 가장 위험한 순간으로 본다. 핵무기는 핵물질 확보와 농축시설, 핵실험 등 개발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물리적 지표가 있지만, AGI는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알고리즘, 데이터, 모델 성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기술적 돌파 시점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상대국의 기술 수준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거나 대응 시기를 앞당기는 요인이 될 수 있다. AGI를 먼저 확보한 국가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질수록 기술 봉쇄와 정보 활동, 사이버 작전 등 선제적 대응에 나설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에 따라 양국이 경쟁을 지속하더라도 기술 발전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위기 소통 채널을 마련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온다.
논쟁은 상대국의 AGI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대응 수단으로까지 이어진다. CNAS 보고서는 외교와 정보 활동, 사이버 작전 등을 포함한 대응 시나리오의 검토를 제안했으며, 발간 이후에는 중국 데이터센터에 대한 군사적 타격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논란이 확산됐다. 보고서가 직접적인 군사 공격을 권고한 것은 아니지만, 기술 경쟁이 극단적으로 격화될 경우 핵심 연산 인프라가 군사적 대응의 대상으로 고려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제기된다. 특히 한쪽의 위기 대응 조치가 상대국에는 공격 준비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 상호 불신과 오판이 실제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위험도 존재한다.
미중 경쟁 속 한국의 선택…기술 확보를 넘어 국제 규칙 형성으로
태재미래전략연구원은 AGI 경쟁의 핵심 위험이 국가 간 기술 격차뿐 아니라 상대국의 개발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불확실성에 있다고 분석했다.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경쟁이 섣부른 대응과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지 않도록 위기관리 체계를 마련하는 한편, AGI가 경제와 군사 시스템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까지 관리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미국과 중국이 AI의 위험성을 인식하더라도 안전조치를 강화하는 동안 상대국이 기술적으로 앞서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협력에는 한계가 따를 수 있다. 따라서 양국의 협력은 상호 신뢰에만 의존하기보다 공통의 위험 기준과 단계적인 이행, 제한적 검증, 정보 보호 및 위반 시 시정 절차 등을 갖추는 방향으로 설계할 필요가 있다. 특히 AI 관련 사고가 발생했을 때 정보를 공유하고 오판을 방지할 수 있는 소통 체계가 중요하다.
반도체와 첨단 연산 인프라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한국에도 이러한 논의는 직접적인 과제다. 태재미래전략연구원은 한국이 AI 사고 통보와 위기 소통 절차를 구체화하고, 프런티어 모델과 핵심 연산 인프라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봤다. 군사 분야에서 인간의 통제와 오판 방지 원칙을 마련하는 것 역시 국제사회에 제안할 수 있는 의제로 제시했다.
산업적 대응도 함께 요구된다. 한국의 AI 기업과 스타트업은 기술 개발과 사업화 과정에서 데이터와 컴퓨팅 인프라의 안정성, 글로벌 공급망 변화, 각국의 AI 규제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따라 AI 산업 전략 역시 모델 개발과 산업 적용에 더해 핵심 인프라 보호와 국제 규범 대응까지 포괄할 필요가 있다.
AGI 경쟁의 결과는 기술 개발의 선후 관계뿐 아니라 확보한 기술을 국가 경쟁력으로 전환하고 그 과정의 위험을 관리하는 역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미중 AI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은 기술과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국제 AI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도 참여해야 한다. 반도체와 첨단 연산 인프라에서 확보한 산업적 기반을 활용해 위기 소통과 안전한 AI 운용에 관한 구체적인 원칙을 제안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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