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판교 쓰리에이로직스 사무실 벽에는 숫자 하나가 실시간으로 올라간다. 회사가 지금까지 판매한 근거리무선통신(NFC) 칩의 누적 판매량으로, 계산서가 발행될 때마다 전광판의 숫자도 함께 바뀐다. 올해 누적 판매량은 3억 개를 넘어섰고 최근 월 판매량은 약 1000만 개에 달한다. 이 속도라면 연말 4억 개 돌파도 가시권에 들어온다.
박광범 쓰리에이로직스 대표는 매일 아침 이 숫자를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대중에게 익숙한 반도체 기업은 아니지만 쓰리에이로직스는 2004년 창업 이후 23년째 NFC라는 한 분야에 집중해온 팹리스다. 회사에 따르면 국내 팹리스 가운데 월 1000만 개 규모로 칩을 판매하는 곳은 쓰리에이로직스가 유일하며, 차량용 NFC 칩 분야에서도 글로벌 3위권에 올라섰다. 상장 첫해 흑자로 전환한 데 이어 올해 1분기 매출은 61억 원을 넘어 전년 동기보다 52% 증가했다.
쓰리에이로직스가 지금의 숫자를 만들기까지 선택한 방법은 사업을 계속 더하는 것보다 잘할 수 있는 영역을 좁히고 그 안에서 기술과 고객을 쌓는 데 가까웠다. NFC의 가능성을 보고 시장이 열리기 전 뛰어들었고, 100가지가 넘는 응용 분야 가운데 10개 안팎을 골라 자원을 집중했다. 차량용 반도체에는 10년을 투자했고, 외형이 더 컸던 사업을 떼어내면서까지 NFC 시스템 반도체에 집중했다. 23년간 이어진 선택과 축적이 이제 자동차와 전자가격표시기(ESL), 디지털 제품여권(DPP)이라는 서로 다른 시장에서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박광범 쓰리에이로직스 대표는 23년간 NFC 한 분야에 집중하며 차량용과 전자가격표시기(ESL) 등으로 적용 시장을 확대해왔다.
남들이 작다고 본 NFC, 100가지 가능성에서 10개를 골랐다
박 대표는 창업 전 반도체 팹리스 회사에서 현재 공동대표인 이평한 대표와 함께 일했다. 한 사람은 기술을, 다른 한 사람은 조직과 사업을 맡으며 호흡을 맞췄고, 2003년 NFC가 사람과 사물, 오프라인과 디지털을 연결하는 기술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고 창업을 결심했다. 카이스트 출신 기술진과 삼성, 하이닉스를 거친 엔지니어를 모아 6명으로 출발했지만 초기 자본 5억 원은 1년도 되지 않아 바닥을 드러냈다. 첫 번째 고비를 넘긴 계기는 휴대폰에 NFC를 적용하려던 LG전자의 10억 원 투자였다.
“남들이 아직 작다고 볼 때 먼저 들어가 원천 설계 역량을 쌓아야 시장이 열렸을 때 따라가는 회사가 아니라 이끄는 회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NFC는 지금처럼 결제와 인증, 출입, 자동차 등에 폭넓게 활용되는 기술이 아니었다. 박 대표는 근거리 무선통신이 결국 사람의 일상과 디지털을 연결하는 접점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봤고, 시장이 충분히 형성되기 전부터 관련 기술을 쌓았다. 그는 당시를 돌아보며 “너무 많은 것을 따졌다면 창업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이 커지면서 또 다른 선택이 필요해졌다. NFC의 응용 분야만 100가지가 넘지만 쓰리에이로직스는 결제와 교통카드 같은 페이먼트 영역보다 자동차와 정품 인증, 전자가격표시기(ESL) 등을 포함한 넌페이먼트 시장에 집중했고, 그 안에서도 10개 안팎의 분야로 범위를 좁혔다.
“팹리스는 선택과 집중이 무너지면 기술 우위도, 원가 경쟁력도, 고객 신뢰도 함께 약해집니다. NFC 분야에서만큼은 글로벌 업체와 정면으로 붙을 수 있는 실력을 만들 수 있다고 봤습니다.”
2023년에는 외형이 더 컸던 사물인터넷(IoT) 모듈 사업을 인적분할했다. 당장의 매출 규모보다 NFC 시스템 반도체라는 회사의 기술 정체성을 선명하게 가져가는 쪽을 택한 결정이었다. 박 대표가 스타트업 후배들에게 “포지셔닝부터 배워야 한다. 내 번지수가 어디인지 알아야 전략이 나온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 경험에서 나왔다. 자신의 기술만 설명하기보다 어느 시장에서 누구와 경쟁하고 어떤 강점으로 선택받을지를 먼저 알아야 자원의 우선순위도 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10년 투자한 차량용 칩, ESL에서는 해외 제품을 국산으로
선택과 집중의 결과가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 분야는 자동차다. 차량용 반도체는 영하 40도에서 영상 120도에 이르는 가혹한 환경을 견뎌야 하고 탑승자의 안전과도 연결돼 개발과 인증, 양산 전 과정에서 높은 신뢰성을 요구한다. NXP와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 강한 시장에서 쓰리에이로직스가 차량용 NFC 칩을 실제 양산까지 연결하는 데는 약 10년이 걸렸다.
개발 과정에서 오류가 반복되자 담당 엔지니어들이 사업을 그만두자고 박 대표를 찾아온 적도 있었다. 시장 진입 시점이 늦어지는 것보다 그동안 쌓은 기술과 핵심 인력을 잃는 것이 더 큰 손실이라고 판단한 박 대표는 개발을 이어갔고, 기술 난도를 높여 후발주자가 쉽게 넘기 어려운 진입장벽을 만드는 쪽을 택했다.
그 결과 쓰리에이로직스의 국산 차량용 NFC 칩은 글로벌 완성차 제조업체의 양산 라인에 들어갔다. 현재 20여 종인 디지털 키 적용 차종은 내년 50여 종으로 증가할 전망이며, 회사는 AEC-Q100 Grade 1과 CCC-CR 등 차량용 NFC 칩 관련 인증도 확보했다. 인증 자체보다 실제 양산과 품질 관리, 완성차 고객 대응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이 후발주자와의 격차를 만드는 요소라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디지털 키 2.0 표준에서 NFC가 필수 기술로 포함된 점도 시장 확대에 힘을 싣는다. 스마트폰 배터리가 방전된 상황에서도 차량 문을 열 수 있다는 NFC의 특성 때문에 블루투스나 초광대역(UWB)만으로 모든 기능을 대체하기 어렵다. 차량 한 대에 도어 개폐용 디지털 키와 무선충전기 등을 포함해 NFC 리더칩이 약 4~7개 들어가는 만큼 적용 차종 확대는 칩 수요 증가로 직결된다.
또 다른 주력 시장인 ESL에서는 해외 제품을 국산 칩으로 대체하며 공급량을 늘리고 있다. 세계 전자가격표시기 시장 2위 업체인 솔루엠은 과거 해외 업체의 칩을 사용했지만 모델별로 쓰리에이로직스 제품을 채택하기 시작했고, 회사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에만 5200만 개를 공급했다. 지난해 연간 공급량 5600만 개에 근접하는 물량을 반년 만에 기록한 셈이다.
쓰리에이로직스는 ESL 시장 점유율을 2024년 약 13%에서 2027년 25%까지 높이는 목표를 세웠다. 신규 시장의 성장만 기다리지 않고 해외 공급사가 차지하던 물량을 원가와 칩 크기, 전력 효율, 공급 안정성을 앞세워 가져오는 전략이다. 여러 산업을 동시에 상대하는 글로벌 대형 반도체 기업과 달리 차량용에서는 저전력, ESL에서는 소모전류처럼 각 시장의 고객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성능에 개발 역량을 집중한다.
박광범 쓰리에이로직스 대표는 누적 NFC 칩 판매량 3억 개를 넘어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듀얼밴드와 디지털 제품여권(DPP) 등 새로운 시장을 준비하고 있다.

NFC·RFID 한 칩에 담아 DPP로…칩에서 SaaS까지
자동차와 ESL에서 양산 경험을 쌓은 쓰리에이로직스는 다음 시장으로 디지털 제품여권(DPP)을 주목하고 있다. EU가 배터리와 섬유 등을 시작으로 제품의 원재료와 생산, 유통, 재활용 관련 정보를 디지털로 관리하는 제도를 확대하면서 관련 데이터를 제품과 연결하는 기술 수요도 커질 것으로 예상해서다.
쓰리에이로직스가 준비한 제품은 NFC와 RFID 기능을 하나의 칩에 담은 듀얼밴드 칩이다. 공급망에서는 RFID를 활용해 여러 상품을 대량으로 인식하고, 소비자 단계에서는 NFC를 통해 스마트폰으로 제품 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두 기술의 역할을 하나로 묶었다. 회사는 NFC와 RFID를 하나의 다이에 구현한 원칩 제품 양산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성공했다고 설명한다.
DPP 규제만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동일한 기술을 정품 인증과 브랜드 고객 관리, 스마트 물류 등 민간 시장에서도 활용하면서 규제 도입 속도에 대한 사업 의존도를 낮추고 있다. 특히 DPP와 정품 인증 시장에서는 칩 공급을 넘어 SaaS 기반 자체 플랫폼 ‘Nedges’를 구축해 구독형 서비스까지 시작했다.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와 데이터 서비스로 사업 범위가 커지면서 정보보안 체계도 갖췄다. 최근에는 국제표준화기구(ISO)와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가 제정한 정보보호 관리체계 국제표준 ‘ISO/IEC 27001’ 인증을 획득했다. 제품 정보를 칩에 담아 읽는 기술에서 출발해 해당 정보를 관리하고 기업이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서비스까지 연결하면서 NFC 칩 한 개에서 발생하는 사업의 범위도 달라지고 있다.
20년 함께한 엔지니어들…퍼스트무버를 만드는 또 하나의 자산
23년 동안 한 기술을 이어오는 데는 제품만큼 사람의 축적도 중요했다. 쓰리에이로직스 전체 인력 가운데 연구개발 인력이 70%를 넘고, 창업 초기부터 함께한 구성원 상당수가 20년 넘게 회사를 지켰다. 설계 인력을 둘러싼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한 팹리스 산업에서 핵심 인력이 오랫동안 함께해온 점을 박 대표는 회사의 중요한 경쟁력으로 꼽는다.
2019년 선포한 ‘행복경영’도 이러한 조직 운영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박 대표가 말하는 행복경영은 단순히 분위기가 좋은 직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존중받고 공정하게 평가받으며 자신의 성장과 회사의 성장을 함께 경험하는 데 초점을 둔다. 주니어보드를 운영하고 석·박사 학위 취득을 지원하는 것도 차세대 리더를 내부에서 키우기 위해서다.
초기에는 대기업 출신 인재를 임원으로 영입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역할이 세분화된 대기업과 달리 중소 팹리스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영역을 함께 살펴야 했고, 결국 오랜 기간 회사의 기술과 시장을 경험한 내부 인력을 리더로 키우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현재 임원 가운데 외부 영입 인사는 없다.
박 대표는 국내 팹리스 생태계를 걱정한다. 국내 팹리스 관련 기업 총수는 100여 개 남짓이고 자체 제품을 상용화하는 국내 팹리스는 30곳 안팎에 불과한 반면 중국은 3600곳에 이른다. 그는 분기 이익이 수십조 원에 이르는 메모리 슈퍼사이클을 두고 “기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수급 문제로 가격이 폭등한 것이며 영원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시스템 반도체와 팹리스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남은 숙제는 좋은 기술 회사를 넘어 꾸준히 이기는 글로벌 회사로 체질을 바꾸는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창업자의 마지막 역할은 회사를 개인의 역량에 기대는 단계에서 벗어나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전광판 숫자를 세는 대표의 시선은 이미 그다음을 향해 있다.
* 스타트업 생태계 기자단은 KAIA와 벤처스퀘어가 함께 운영하며 스타트업 현장의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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