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기업이 개발하는 제품은 단순 하드웨어를 넘어 전력·제어·배터리·통신이 결합된 복합 시스템으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전동화와 자율화, 지속가능성 요구가 커지면서 성능뿐 아니라 안전성과 신뢰성, 이상 상황 대응까지 제품 개발 초기 단계에서 함께 검증해야 하는 필요성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고전압·고속·고위험 조건처럼 반복 시험 자체가 부담이 되는 분야에서는 실제 프로토타입 제작 이전 단계에서 시뮬레이션과 디지털 트윈을 통한 가상 검증이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실시간 시뮬레이션과 실제 제어기를 가상 환경에 연결해 시스템을 검증하는 HIL(Hardware-in-the-Loop), 즉 가상 검증 기반 개발은 이제 일부 전문 영역을 넘어 다양한 산업의 제품 개발 과정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분위기다.
복잡한 시스템일수록 개발 후반부에 발생하는 수정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먼저 만들고 나중에 수정한다”는 방식은 시스템 구조가 단순하던 시절에는 가능했지만, 전력·제어·배터리·통신이 얽힌 복합 시스템 환경에서는 한계가 뚜렷하다.
스타트업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제한된 자원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스타트업일수록 개발 후반의 설계 변경이나 재작업이 일정과 비용 전체를 흔들 수 있어 설계 초기 단계부터 검증을 선행하는 방식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
시뮬레이션은 실제 제작 이전 단계에서 시스템 동작과 이상 상황을 가상 환경 안에서 반복적으로 검증할 수 있어 시행착오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다. 전동화 시스템과 모빌리티, 전력 시스템, 산업 장비처럼 실제 테스트 환경 구축 자체가 고비용·고위험인 분야에서는 특히 디지털 트윈과 실시간 시뮬레이션, HIL 기반 테스트 같은 가상 검증 방식의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다.
실제 테스트를 대신하는 시뮬레이션
고위험·고비용 테스트 환경이 개발 속도를 제한하는 상황에서 스타트업들은 시뮬레이션을 실제 테스트의 대안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국내 스타트업 위드비어(WithBEER)는 전력 시스템 개발 과정에서 고전압 장비 테스트에 수반되는 안전 위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스웍스의 시뮬링크(Simulink)와 심스케이프 일렉트리얼(Simscape Electrical)을 활용한 HIL 기반 가상 테스트 환경을 구축했다. 반복 수행이 어려운 고전압 조건을 실험실 환경 안에서 보다 안전하게 재현하며 개발과 검증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한 사례다.
미국 스타트업 플럭스 마린(Flux Marine) 역시 100% 전기식 선박 추진 시스템을 개발하면서 시뮬링크 기반 디지털 트윈으로 배터리·전력·제어 시스템을 통합 모델링했다. 실제 해양 환경 테스트 이전에 이상 상황과 성능 한계를 가상 환경에서 반복 검증함으로써 고위험 테스트에 따른 리스크와 비용 부담을 낮췄다.
두 사례 모두 시뮬레이션이 단순한 설계 보조 수단을 넘어 실제 테스트를 보완하거나 대체하는 핵심 개발 인프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 다른 흐름은 개발 전 과정을 하나의 워크플로우로 연결해 반복 작업과 오류를 줄이는 방식이다.
독일 스타트업 벡바이저(weg//weiser)는 전기 모터 테스트와 커미셔닝 과정의 복잡성을 줄이기 위해 매트랩(MATLAB)과 시뮬링크 기반으로 측정 데이터 분석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시뮬링크 코더(Simulink Coder)로 코드를 자동 생성해 테스트 시스템에 직접 배포하는 구조를 구축했다. 여기에 스테이트플로우(Stateflow)를 활용해 복잡한 테스트 루틴 자동화까지 구현하며 연구개발 비용을 약 50% 절감했다.
유럽 스타트업 데스티누스(Destinus)는 마하 5급 극초음속 수소 항공기 개발 과정에서 스위스·스페인·독일에 분산된 팀들이 설계한 구조·추진·냉각·제어 시스템을 하나의 시뮬링크 모델 안에서 통합하고, MATLAB Aerospace Toolbox를 활용해 전체 비행 성능을 반복 검증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시뮬레이션 기반 통합 환경은 팀 간 인터페이스 오류를 조기에 발견하고 반복 검증 효율을 높이는 데 활용됐다. 업종과 규모는 다르지만 두 스타트업 모두 복잡한 시스템 개발에서는 개발 단계 간 연결이 끊기지 않는 통합 워크플로우가 속도와 품질 모두를 좌우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제품을 만들기 전에 먼저 검증하는 것, 그리고 그 검증을 개발 전 과정 안에 촘촘히 연결하는 것. 고전압 테스트를 실험실 안에서 안전하게 재현하든, 극초음속 항공기의 비행 성능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팀들과 함께 가상 환경에서 검증하든, 이들이 시뮬레이션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한 기술 과시 때문이 아니었다.
실패 한 번이 회사 전체를 흔들 수 있는 현실 속에서, 개발 후반에 발생하는 대규모 수정 비용과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택에 가까웠다.
시뮬레이션 기반 개발은 스타트업이 개발 초기 단계에서 오류를 사전에 검증하고, 실제 제작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대규모 수정과 재작업 비용을 줄일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복잡한 시스템일수록 단 한 번의 설계 오류가 일정과 비용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가상 환경에서 반복적으로 검증 가능한 개발 방식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동시에 자원이 제한된 스타트업도 대기업 수준의 검증 프로세스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은 제품 완성도와 시장 신뢰도의 출발선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제품 개발 복잡성이 높아질수록 실제 제작 이전 단계에서 얼마나 많은 문제를 먼저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는지가 앞으로의 경쟁력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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