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은 법무법인 임팩터스 대표 변호사는 한때 스타트업 변호사를 “배의 기관사”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엔진이 멈추지 않도록, 풍랑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도록 뒤에서 운항을 지탱하는 존재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7년이 지난 지금, 그의 역할은 훨씬 앞쪽으로 이동해 있다. 이제 그는 단순히 위험을 막는 사람이 아니라, 창업자들과 함께 항로 자체를 설계하는 파트너에 가깝다.
AI와 데이터, 글로벌 규제와 투자 환경 변화가 동시에 얽히는 시대가 되면서 법률의 역할 역시 달라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장 대표는 “예전처럼 ‘법적으로 문제없습니다’ 정도의 자문만으로는 실제 회사를 지키기 어려워졌다”며 “무엇을 감수하고 무엇을 포기할지까지 초기 단계에서 함께 설계해야 하는 시대”라고 말했다.
“AI 시대, 법률은 사후 대응이 아니라 성장 구조 설계가 된다”
장 대표가 최근 가장 중요하게 보는 영역은 지식재산권(IP)과 컴플라이언스다. 생성형 AI 시대가 본격화될수록 이 문제는 더욱 민감해지고 있다. 콘텐츠와 데이터, 브랜드 자산, 서비스 화면, AI 학습 데이터까지 기업의 핵심 자산 대부분이 권리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는 회사의 핵심 자산이 어디서 왔고 누구의 권리에 기반하고 있는지가 훨씬 중요해졌다”며 “이 문제는 단순 손해배상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투자나 글로벌 파트너십 자체를 멈추게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투자자들의 시선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시장 규모와 성장 속도, 창업자의 실행력이 핵심이었다면, 최근에는 그 성장이 어떤 구조 위에 올라가 있는지를 더 면밀히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계약 구조와 데이터 관리 체계, 노동 이슈와 IP 권리 관계까지 기업가치 평가 요소로 연결된다.
장 대표는 “과거에는 법률이 비용처럼 여겨졌다면, 지금은 투자 조건과 기업가치에 직접 연결되는 영역이 됐다”며 “특히 글로벌 VC들은 이미 그런 기준으로 회사를 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컴플라이언스를 규제가 아닌 ‘신뢰 인프라’라고 정의했다. 어떤 데이터를 어떤 권원으로 활용했는지, 개인정보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AI 생성 결과물의 책임 구조를 어떻게 설계했는지가 결국 글로벌 시장에서 회사를 설명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기술이 상향평준화될수록 차이는 결국 구조에서 벌어집니다. 규제를 피하는 회사보다 규제를 견딜 수 있게 설계된 회사가 살아남게 될 겁니다.”
미국은 진출이 아니라 정착의 문제
장 대표는 최근 법률 자문을 넘어 미국 GTM(Go-To-Market) 프로그램인 ‘GNC(Global Next Club)’ 운영에도 힘을 쏟고 있다. 단순 법인 설립이나 계약 검토 수준이 아니라, 현지 네트워크와 투자자 커뮤니케이션, 세무·결제·이민까지 함께 설계하는 구조다.
그는 미국 시장을 단기 성과 중심으로 접근하는 한국 스타트업의 습관을 가장 큰 위험 요소 중 하나로 꼽았다.
“미국은 생각보다 훨씬 관계지향적이고 장기적인 시장입니다. 몇 달 안에 결과를 만들겠다는 접근으로는 결국 뿌리내리기 어렵습니다.”
특히 그는 영어 실력 자체보다 ‘아우라 영어’를 강조했다. 단순히 유창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하며 왜 이 일을 하는지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힘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GNC 역시 이런 현실에서 출발했다. 1기 운영 과정에서 산업마다 현장 감각과 시장 구조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체감했고, 이후 AI·뷰티·헬스케어 트랙을 별도로 분리했다. 공통 인프라는 공유하되, 실제 사업화와 네트워크 연결은 산업별로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장 대표는 오랜 시간 다양한 창업자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살아남는 팀들의 공통점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창업자들이 결국 오래 간다”며 “무엇을 잘하고 무엇이 부족한지 인정하고, 자신과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을 동료로 받아들일 수 있는 팀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위험한 조직은 창업자 혼자 방향을 밀어붙이는 팀이라고 진단했다. 초기에는 실행력이 강해 보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부 신뢰가 흔들리고 핵심 의사결정 구조가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글로벌은 나중에 가는 시장이 아니다
장 대표는 지금 스타트업들이 가장 빨리 버려야 할 낡은 공식으로 “국내에서 충분히 성공한 뒤 해외로 나간다”는 사고방식을 꼽았다.
그는 “이제는 창업 초기부터 데이터 구조와 서비스 정책, 결제 시스템, 브랜드 확장성까지 글로벌 기준으로 설계해야 한다”며 “그렇게 만들어진 회사는 나중에 해외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글로벌 기업으로 움직이게 된다”고 말했다.
스타트업은 창업자 혼자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시장과 팀, 투자자, 고객과 끊임없이 조율하며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법률 역시 더 이상 마지막 단계에서 등장하는 안전장치가 아니다.
AI와 데이터, 글로벌 규제가 뒤엉킨 지금의 시장에서 법률은 사업이 흔들리지 않도록 뒤에서 지탱하는 기관사를 넘어, 처음부터 함께 방향을 설계하고 리스크와 성장의 균형을 조율하는 ‘항해 파트너’에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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