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오래 사용하고,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하는 배터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 배터리의 성능을 높이기 위한 연구는 오랫동안 양극재와 전해질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전고체 배터리와 리튬메탈 배터리 등 차세대 기술이 등장하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바로 에너지를 저장하고 방출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음극의 변화다.
새로운 음극을 개발하는 일은 소재를 바꾸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금속을 얼마나 얇고 균일하게 만들 수 있는지, 서로 다른 금속을 어떤 순서와 구조로 쌓을 수 있는지에 따라 배터리의 성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새로운 음극 구조를 시험하려는 연구기관과 기업에는 설계한 소재를 실제 배터리 셀에 적용할 수 있도록 정밀하게 제작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발견한 이가 차세대 금속 음극 제조기업 플럭스를 이끄는 이정민 대표다. 그가 주목한 것은 배터리 산업에서 새로 등장한 제조 방식이 아니라, OLED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오랫동안 활용돼 온 진공 증착 기술이었다. 넓은 면적에 얇고 균일한 막을 형성하는 기술을 배터리 음극 제조에 적용한다면 기존 방식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서로 다른 산업의 기술을 연결해 새로운 시장에 도전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OLED 증착 기술이 차세대 배터리로 향한 이유
이정민 대표가 창업을 결심한 출발점에는 OLED 산업에서 오랫동안 다듬어진 정밀 제조 기술을 다른 산업에서 새롭게 쓰고 싶다는 고민이 있었다. 다만 그가 먼저 따져 본 것은 기술 자체보다 시장이었다. 기술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과 시장이 실제로 그 기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존 방식의 한계에 부딪혀 새로운 제조 기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산업을 찾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차세대 배터리였다.
그동안 배터리 성능 경쟁은 양극재와 전해질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음극은 안정성과 가격 경쟁력이 뛰어난 흑연이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 왔다. 그러나 전기차와 드론, 휴머노이드처럼 배터리 무게가 곧 성능으로 이어지는 분야가 커지면서 흑연만으로는 에너지밀도를 더 끌어올리기 어려워졌다. 업계가 음극에 주목하는 이유다. 현재 차세대 음극 개발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흑연 대신 얇은 리튬 금속을 음극으로 쓰는 리튬메탈 배터리다. 다른 하나는 음극 활물질을 아예 없애고, 충전 과정에서 양극에서 넘어온 리튬이 집전체 위에 직접 쌓이도록 하는 무음극(Anode-free) 배터리다.
“OLED의 성숙된 기술을 타 분야에 적용해서 큰 획을 긋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기존 배터리가 양극재와 전해질의 승부였다면, 차세대 배터리는 음극재에서 승부가 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두 방향 모두 음극의 부피와 무게를 줄여 에너지밀도를 크게 높일 수 있다. 이때부터 중요해지는 것은 어떤 소재를 쓰느냐보다 그 소재를 어떻게 만드느냐다. 리튬메탈 배터리에서는 몇 마이크로미터 두께의 리튬을 어떤 집전체 위에, 얼마나 균일하게 형성하느냐가 성능을 가른다. 무음극 배터리에서는 리튬이 한곳에 뭉치거나 나뭇가지 모양(덴드라이트)으로 자라지 않고 고르게 쌓이도록 집전체 표면을 설계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나 금속을 눌러 얇게 펴는 기존 압연 방식으로는 리튬을 매우 얇고 균일하게 만들기 어렵다. 여러 금속을 조합해 시드층과 합금층, 다층 구조를 자유롭게 구현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이 대표가 해법으로 본 것은 디스플레이 공정에서 쓰여 온 물리적 기상 증착(PVD)이다. 진공 환경에서 금속을 증발시키거나 물리적인 방법으로 기판 표면에 쌓아 박막을 형성하는 기술이다. OLED 양산 현장에서는 넓은 기판 위에 얇은 막을 고르게 입히는 데 이미 쓰이고 있다. 플럭스는 이 열증착 공정 경험을 바탕으로 구리 집전체(Cu Foil) 위에 리튬과 은, 아연, 불화리튬 등 다양한 소재를 증착한다. 리튬메탈 배터리용으로는 원하는 두께의 리튬 박막을 직접 형성한다. 무음극 배터리용으로는 리튬이 고르게 자리 잡도록 돕는 은 시드층(Seed Layer)을 입힌다. 불화리튬은 리튬 표면을 안정화하는 보호층으로 쓰인다. 고객의 요구에 따라 금속층의 두께를 조정하거나 여러 층을 겹쳐 쌓고 합금층을 구성할 수도 있다. 하나의 증착 공정으로 차세대 음극의 두 방향에 모두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이 회사가 제시하는 박막 구현 범위는 약 1나노미터(㎚)에서 20마이크로미터(㎛)까지다. 300㎜급 대면적 증착 기술을 확보했으며, 리튬 박막에서는 ±2%대 수준의 두께 균일도를 구현했다는 설명이다. 단순히 금속을 얇게 만드는 것을 넘어, 실제 셀에 쓸 수 있는 넓은 면적에서도 원하는 두께와 구조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기술의 핵심이다.
이러한 제조 방식은 배터리 업계가 음극을 개발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지금까지는 정해진 규격의 금속박을 골라 셀에 맞춰 써야 했다. 이제는 셀 설계에 맞춰 음극 구조를 먼저 설계하고 그대로 제작할 수 있다. 새로운 음극 구조를 시험하려면 연구팀이 증착 설비를 직접 들이고 공정을 처음부터 개발해야 했던 부담도 줄어든다. 플럭스에 금속의 종류와 두께, 층 구조를 제시하면 증착 레시피 설계, 샘플 제작, 셀 시험, 개선 샘플 제작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빠르게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가 구상한 음극을 곧바로 실제 셀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규격이 정해진 제품을 공급하는 대신, 고객이 개발하려는 배터리에 맞춰 음극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것이 플럭스의 사업 방향이다. 기존 제조 기술의 새로운 쓰임을 찾으려 했던 창업자의 고민이 맞춤형 금속 음극 제조라는 사업모델로 구체화된 셈이다.
고객이 기다려 준 첫 장비, 기술 검증의 출발점
기술을 확보했다고 해서 곧바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플럭스가 뛰어든 분야는 고가의 제조장비와 정밀한 공정 관리가 필요한 첨단 제조업이다. 기술을 실제 제품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장비부터 갖춰야 했다. 이미 양산 현장에서 축적한 경험이 있었지만, 창업기업이 독자적으로 생산 기반을 마련하는 일은 또 다른 과제였다.
특히 초기 제조장비의 성능과 투자비용 사이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증착 면적과 사용시간을 줄여 초기 비용을 낮출 것인지, 더 많은 비용을 들이더라도 고객의 다양한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성능을 확보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이 대표는 후자를 택했다. 처음부터 넓은 면적에 안정적으로 금속을 증착할 수 있는 장비를 확보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연구용 샘플을 제작하는 단계에서도 장기적으로 양산에 활용할 수 있는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작은 증착 면적, 적은 사용시간 등의 적정한 성능으로 가격을 타협할 것인가, 넓은 증착 면적과 오랜 사용시간 등을 만족시키는 성능을 최대화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플럭스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고비용의 장비를 선택한 판단이 실제 사업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기술의 가치를 알아보는 고객이 필요했다. 플럭스의 첫 고객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이었다. 차세대 배터리를 연구하던 연구진은 정밀하고 균일한 금속 박막으로 구성된 음극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연구진은 플럭스의 기술을 소개받은 뒤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고, 회사가 제조장비를 갖추기까지 기다려 주었다. 창업 초기 생산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 기업에 첫 고객이 생겼다는 사실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개발한 기술을 설명하는 단계를 넘어 실제 연구에 필요한 제품을 공급하고 배터리 셀에서 검증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연구진은 고품질의 박막으로 형성된 음극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저희 기술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해 주셨고, 장비를 갖추기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덕분에 제품을 공급하고 PoC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연구진은 공급받은 음극을 실제 배터리에 적용해 성능을 시험했다. 이 대표는 당시 실증 결과에 대해 높은 만족도를 보였다고 설명한다. 이후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은 2025년 11월부터 플럭스의 음극을 지속적으로 구매하고 있다. 첫 납품이 반복 구매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연구용 시제품을 제조하는 창업기업에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무엇보다 이 대표에게 중요한 것은 고객의 평가였다. 제품을 사용한 연구진들로부터 기존에 접하지 못했던 데이터를 확인했다거나, 오랜 연구 경험에서 높은 수준의 음극이라는 반응을 들었다고 한다. 앞으로도 연구 과정에서 계속 협력하고 싶다는 요청 역시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현재까지 플럭스의 최대 성과는 고객들의 반응입니다. 저희 제품을 경험한 고객들이 만족하고, 그분들의 연구와 평가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인 것 같습니다.”
사업의 초기 성과를 매출 규모나 생산량보다 고객의 경험에서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플럭스의 현재 주된 수익원은 연구기관과 배터리 기업에 공급하는 맞춤형 음극 샘플이다. 고객이 새로운 구조를 시험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첫 고객과의 협력은 이후 다른 기업과의 기술 검증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국내 대기업과 차세대 배터리 개발기업 등으로 협력 범위를 넓히면서 다양한 음극 구조의 적용 가능성을 확인하는 단계다. 기술을 보유한 기업에서 고객의 연구개발 과정에 참여하는 제조 파트너로 역할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맞춤형 음극 제작에서 ‘금속 음극 파운드리’로
플럭스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모습은 고객이 원하는 금속 음극을 개발하고 제조하는 전문기업이다. 새로운 반도체를 설계한 기업이 제조공정을 전문기업에 맡기듯, 배터리를 개발하는 기업도 필요한 음극 구조를 설계하고 이를 제조 전문기업에 의뢰할 수 있다는 구상이다.
이 회사가 제시하는 ‘금속 음극 파운드리(Metal Anode Foundry)’라는 개념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배터리 기업이 직접 증착 설비를 구축하고 공정을 개발하는 대신, 전문 제조기업과 함께 원하는 음극을 제작하고 검증하는 방식이다.
연구팀은 필요한 금속의 종류와 두께, 층 구조를 정하고, 플럭스는 그에 맞는 증착 조건을 설계한다. 제작된 샘플은 고객의 배터리 셀 시험에 사용되며, 결과에 따라 다시 구조를 개선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연구 단계에서 검토한 기술을 실제 제조 가능성까지 연결하는 것이 목표다.
다만 본격적인 양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도 남아 있다. 현재 확보한 장비는 다양한 연구용 시제품을 제작하는 데 활용되고 있지만, 대량생산에 최적화된 설비는 아니다. 고객의 연구개발 수요에 대응하는 단계를 넘어 생산량을 확대하려면 추가적인 설비투자가 필요하다.
플럭스는 이를 위해 투자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초기부터 장비 성능에 투자해 기술적 기반을 확보했다면, 다음 단계에서는 생산능력을 확대해 고객의 양산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사업 전략과 투자 유치, 파트너십 구축에는 대기업 경영전략과 벤처캐피털 투자 경력을 가진 김현우 이사(CSO)가 함께하고 있다. 연구개발 단계에서 기술을 검증하는 동시에 향후 생산 확대에 필요한 사업적 기반도 준비하고 있다.
이 대표가 앞으로 1년 동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제는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다. 좋은 음극을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배터리의 성능을 증명할 수는 없다. 실제 배터리에 적용하고 시험한 결과가 쌓여야 기술의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객과의 협력이 늘어날수록 서로 다른 소재와 구조를 검증할 기회도 함께 확대된다.
협력의 범위는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바라보고 있다. 차세대 배터리를 개발하는 국내 대기업은 물론, 한국의 정밀 제조 기술을 경험할 기회가 적었던 해외 기업들과도 협력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OLED 산업에서 축적한 제조 경험을 새로운 시장으로 확장하려던 창업 초기의 생각이 글로벌 배터리 산업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 1년 동안은 많은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장기적으로는 국내 배터리가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플럭스가 만드는 것은 눈으로 두께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금속 박막이다. 그러나 그 얇은 금속막에는 오랫동안 축적된 제조 기술과 새로운 산업에 대한 창업자의 판단이 담겨 있다. 기존 산업에서 검증된 기술을 다른 산업에 적용하고, 첫 고객과의 실증을 통해 사업의 가능성을 확인한 과정은 기술 창업이 어떻게 시장과 만나는지를 보여준다.
이정민 대표는 지금도 더 많은 고객이 플럭스의 음극을 실제 배터리에 적용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연구자가 구상한 새로운 배터리 구조가 실험실을 넘어 실제 제품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필요한 제조기술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플럭스가 찾은 역할이자 앞으로 키워 나가려는 사업이다. 디스플레이에서 출발한 정밀 증착 기술이 차세대 배터리의 성능을 바꾸는 기술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플럭스의 다음 도전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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