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방은 의료의 영역입니다. 삐약의 역할은 약을 처방받은 사람이 일상을 잘 관리하도록 돕는 겁니다.”
비만 치료제 관리 앱 ‘삐약’을 운영하는 천예슬 비비드헬스 대표는 벤처스퀘어와의 인터뷰에서 처방 이후의 생활관리에 주목한 이유를 설명했다. 삐약은 의료진의 처방과 치료계획을 바탕으로 약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투약 일정과 체중 변화, 이상반응 등을 기록하고 자신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지원한다.
위고비와 마운자로 등 GLP-1 계열 비만 치료제의 사용이 확대되면서 약을 처방받은 이후의 일상적인 관리도 새로운 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체중 감량 효과뿐 아니라 투약 과정에서 나타나는 신체 변화와 식단, 영양 섭취까지 체계적으로 관리하려는 수요가 늘면서 관련 서비스의 역할도 커지는 추세다. 비비드헬스에 따르면 ‘삐약’의 가입자는 2026년 9월 기준 20만 명을 돌파했으며, 8월까지 축적된 누적 데이터는 600만 건을 넘어섰다.
천예슬 비비드헬스 대표
자신의 투약 기록에서 찾은 두 번째 창업 아이템
비비드헬스는 천 대표의 두 번째 창업이다. 첫 사업을 접은 뒤 신체적·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다시 창업을 선택했다. 그는 당시를 돌아보며 “극복할 방법을 고민하다 보니 한 번 더 해야겠다는 결론이 이미 나와 있었다”고 말했다.
공동창업자인 조재민 이사와 함께 헬스케어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해 온 천 대표는 비의료인으로서 의료 서비스와 환자의 실제 수요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경험했다. 천식으로 병원을 다니면서도 의료진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보와 환자가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도움은 다를 수 있다고 느꼈다.
“환자를 위한 서비스인데 의료 공급자가 보고 싶은 것 위주로 만들어지는 데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의료진은 호흡 데이터를 분석하고 싶어 하지만 환자가 원하는 건 촉촉한 마스크일 수도 있어요. 헬스케어와 웰니스 사이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봤습니다.”
구체적인 사업 아이템은 자신의 체중 관리 경험에서 나왔다. 질환으로 병원을 오가던 시기 체중이 70kg 가까이 늘었고, 담당 의사에게 체중 감량을 권유받았다. 이후 비만 치료제 삭센다를 사용하면서 투약 정보와 다른 이용자의 후기를 직접 찾아야 했다.
처음에는 화장품 리뷰 앱처럼 다이어트·피임·탈모·피부염 치료제 등의 후기를 모으는 플랫폼을 구상했다. 그러나 약 한 달 동안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천 대표가 가장 자주 확인한 정보는 자신의 삭센다 투약 기록과 체중 변화였다. 투약 경험을 기록하고 다른 이용자의 후기를 참고할 수 있는 서비스에 대한 필요성을 확인하면서 사업 방향도 구체화됐다.
“나 같은 사람들을 모아 후기를 보고, 기록하고, 관리하는 서비스를 만들자는 것이 ‘삐약’의 시작이었습니다.”
평균 BMI 30…온라인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이용자들
삐약에 가입하려면 키와 시작 체중, 목표 체중 등을 입력해야 한다. 천예슬 대표에 따르면 가입자의 90% 이상이 관련 정보를 등록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산출한 평균 체질량지수(BMI)는 약 30이었다. 온라인 커뮤니티나 언론 보도에서 접했던 비만 치료제 이용자들의 모습과는 다소 다른 결과로, 천 대표 역시 실제 데이터에서 확인된 평균 BMI가 예상보다 높다는 점에 주목했다. 오랫동안 비만을 겪어온 사람일수록 자신의 체중이나 감량 과정을 공개적으로 공유하는 데 소극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온라인에서 활발하게 후기를 남기는 일부 이용자의 경험만으로 전체 이용자의 특성을 파악하기 어려운 만큼 극적인 감량 성공담이나 심각한 부작용 사례가 일반적인 결과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상도 경계했다. 개인마다 치료 경험과 신체 반응이 다르기 때문에 플랫폼이 제공하는 정보의 균형과 신뢰성에도 책임이 따른다고 봤다.
이용자 구성과 서비스 확산 과정에서도 흥미로운 특징이 발견됐다. 현재는 여성 비중이 높지만 초기 남녀 이용자 비율은 5대 5 수준이었다. 남성 이용자 유입에 영향을 미친 것은 한 이용자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유한 체중 감량 그래프였다. 개인의 체중 변화를 시각화한 이미지가 남성 이용자가 많은 커뮤니티로 퍼지면서 서비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앱에서는 체중 변화 추이를 그래프로 확인하고 자신의 감량 속도를 임상시험 결과와 비교할 수 있다. 특히 남성 이용자들은 감량 경험을 공유할 때 주관적인 후기보다 수치와 그래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경향을 보였다.
“스스로 검증해야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커뮤니티 글에 그래프가 거의 빠지지 않아요. 자랑이라기보다 증거에 가깝습니다.”
개인의 체중과 투약 기록은 건강관리 도구를 넘어 다른 이용자의 관심과 참여를 이끄는 콘텐츠로도 활용됐다.
GLP-1 비만 치료제 관리 앱 ‘삐약’
처방은 병원, 삐약은 그다음
의약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삐약은 의료행위와 생활관리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한다. 진단과 처방, 치료계획은 의료진의 영역으로 두되, 앱에서는 투약 일정과 체중, 식욕, 이상반응 등을 기록하고 이용자들이 서로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돕는다.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신체 변화를 꾸준히 살피면서도 의료적 판단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구조다.
천 대표가 주목한 시장은 병원 밖에서 시작된다. GLP-1 치료제를 처방받은 이용자들은 체중 감량 못지않게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어떤 영양제를 선택할 수 있는지, 식단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궁금해한다.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더라도 매일의 식사와 영양 섭취, 생활습관까지 지속적으로 관리하기는 쉽지 않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으면 체중은 줄 수 있지만 식단과 생활습관까지 병원이 관리해 주지는 않습니다. GLP-1 치료제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관리 시장이 생겼습니다.”
비비드헬스는 축적된 이용자 기록과 의견을 토대로 식품·건강 관련 기업과의 협력도 추진하고 있다. 간식과 대체식, 단백질 제품, 영양제 등을 개발하는 기업에 GLP-1 치료제 이용자의 수요와 관련 데이터를 제공하는 한편, 앱 안에서 적합한 제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사업을 준비 중이다. 이용자가 실제로 필요로 하는 제품을 발굴하고 기업의 상품 개발에도 관련 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사업 구조를 설계하고 있다.
제품을 선별할 때는 자체 평가 지표인 ‘GLP-1 스코어’를 적용한다. 이용자 특성에 맞는 제품을 가려내기 위한 기준으로, 천 대표는 판매 수수료가 높더라도 평가 점수가 낮은 제품은 광고를 받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단기적인 광고 수익보다 이용자들이 축적해 온 신뢰를 지키는 일이 우선이라는 판단에서다.
이용자에게는 제품 선택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기업에는 기존 소비자 조사만으로 파악하기 어려웠던 GLP-1 치료제 이용자의 수요를 전달한다. 천 대표는 누적된 데이터를 활용해 제품 평가 기준을 정교화하고, 이를 커머스와 기업 대상 데이터 사업의 경쟁력으로 발전시키려 한다.
600만 건의 기록, 예측 기능 공개에는 신중
비비드헬스는 중소벤처기업부 팁스(TIPS) 과제를 통해 이용자 기록을 활용한 예측 기능도 개발했다. 투약 용량과 체중 변화, 이상반응 등 기록 유형이 비슷한 이용자들의 데이터를 비교해 새 이용자가 자신과 유사한 조건의 사례를 참고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2026년 8월 기준 누적 데이터가 600만 건을 넘어서면서 분석에 활용할 수 있는 정보도 풍부해졌지만, 개발을 마친 예측 기능은 아직 일반 이용자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과거 이용자의 기록을 분석한 결과가 개인의 향후 체중 변화나 부작용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정보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을 고려해서다.
“진단이나 처방의 영역에 닿을 수 있는 기능이어서 이용자가 결과를 맹신하지 않도록 안전장치와 교육을 함께 설계해야 합니다. 기능을 소개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라서 공개 방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천 대표는 복약 이력과 생활습관, 개인별 건강 상태 등 다양한 변수가 치료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이용자들이 데이터 분석 결과를 의료적 판단으로 오인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삐약이 지향하는 역할 역시 개인에게 정답을 제시하는 것보다 비슷한 조건의 이용자들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지 객관적인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14kg 감량 이후에도 남은 질문…삐약이 겨냥한 다음 시장
천 대표는 지금도 삐약을 사용한다. GLP-1 계열 주사제로 14kg을 감량했지만 이후 4kg이 다시 늘었고, 현재는 저용량 유지요법을 고민하고 있다. 치료제를 통해 체중을 줄이는 것과 감량한 체중을 장기간 유지하는 일은 서로 다른 과제라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으로 확인한 셈이다. 약을 사용하는 동안 무엇을 먹고 어떤 변화를 기록해야 하는지, 치료 이후의 생활습관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는 삐약을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천 대표가 붙들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비비드헬스가 다음 사업 무대로 주목하는 곳은 아시아다. GLP-1 계열 비만 치료제의 도입과 이용이 확대되는 국가를 중심으로 진출을 검토하되, 국내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업 전개 방식에는 변화를 줄 생각이다. 한국에서는 이용자를 확보하고 데이터를 축적한 뒤 식품과 커머스로 사업을 확장했다면 해외에서는 처음부터 관리 서비스와 관련 제품 판매를 결합해 시장에 진입하려 한다.
“K-뷰티나 K-푸드가 아시아에서 잘 통하는 것처럼 서비스와 먹는 제품의 커머스를 동시에 가져가는 방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비드헬스가 주목하는 사업 기회는 비만 치료제의 판매량 증가에만 있지 않다. 치료제를 사용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투약 중 경험하는 신체 변화와 식생활, 영양 관리에 관한 정보도 필요해진다. 삐약에 축적된 600만 건 이상의 기록은 이용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반이다. 천 대표는 이를 토대로 개인의 경험에 의존하던 생활관리 정보를 체계화하고, 제품 선택에도 활용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려 한다.
“GLP-1 시대에 먹는 것과 약을 현실적으로 쓰는 기준을 데이터로 만들고 싶습니다.”
14kg을 감량하고도 다시 체중이 늘었던 창업자의 경험은 삐약이 풀어야 할 과제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처방으로 시작된 치료는 병원 밖의 일상에서도 이어지며, 그 과정에서 이용자는 수많은 선택과 마주한다. 천 대표가 비비드헬스를 통해 구축하려는 경쟁력은 바로 그 선택에 필요한 정보를 축적하고, 개인의 경험을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로 발전시키는 데 있다.
* 스타트업 생태계 기자단은 KAIA와 벤처스퀘어가 함께 운영하며 스타트업 현장의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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