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대표들을 만나면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지금 투자자나 인수 후보자와 논의 중인데, 계속 연락해서 진행 상황을 확인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나을까요?”
회사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상황이니 연락 한 번 하는 것조차 조심스럽고 망설여지는 것은 당연하다. 무작정 연락하자니 부담을 주어 상대의 마음을 닫게 할까 두렵고, 가만히 있자니 속이 타들어 간다. 과연 집요함과 끈질김은 협상에서 독이 될까, 약이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끈질김은 훌륭한 협상의 무기다.
멍때리던 사원에게 떨어진 특명, “매일 전화하라”
과거 대기업 M&A 실무자로 꽤 규모가 큰 기업의 인수전을 진행할 때의 일이다. 당시 직속 상사는 입찰을 앞두고 대뜸 “경쟁자가 어디인지 알아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매각주간사가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경쟁자를 알아내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을 때리고 있던 내게 상사는 뜻밖의 해법을 제시했다.
“오늘부터 매각주간사인 대형 회계법인의 담당 임원에게 무조건 매일 전화를 거십시오.”
지시를 명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날부터 매일같이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프로젝트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혹시 다른 경쟁자는 있습니까?”라며 딱딱한 업무 질문만 던졌다. 하지만 매일 전화를 걸다 보니 앵무새처럼 똑같은 질문만 반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통화를 이어가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주말은 잘 보내셨는지 일상적인 안부를 묻기도 하고, 상대가 맡고 있는 다른 프로젝트로 질문의 범위를 넓혀갔다. 시간이 지나자 나중에는 전화를 받자마자 “또 저입니다! 오늘도 안부 인사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라며 넉살을 부리게 됐다. 상대방도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나중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넘기며 젊은 사원의 풋풋한 열정으로 받아주었다.
그렇게 매일 통화가 이어지던 어느 날, 담당 임원이 항복하듯 말했다.
“이렇게까지 매일 전화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쟁사나 중요한 이슈가 생기면 제가 가장 먼저, 반드시 알려드릴 테니 제발 매일 연락하지 마십시오.”
그제야 무작정 전화를 걸라고 했던 상사의 진짜 의도를 깨달았다. 애초에 상사의 목표는 당장 경쟁사 이름 하나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주간사 담당자의 입에서 ‘중요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 즉 정보의 ‘우선순위’를 선점하는 것이었다.
확답을 얻어낸 후로는 2~3일에 한 번씩 연락하며 수위를 조절했고, 우리 팀은 인수전 내내 가장 빠르고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투자자와 인수 후보자에게 연락을 이어갈지 고민하는 협상의 순간을 표현한 이미지. 상대를 배려하며 꾸준히 이어가는 연락은 신뢰를 쌓고 새로운 협상 기회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출처: AI 생성형 이미지)
선을 넘지 않는 집요함은 ‘진심’으로 번역된다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이렇듯 끈질기게 요청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때로는 그 집요함이 부담스러워 마음이 닫히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그 끈질김에 왠지 미안해져 한 번 더 만나게 된다.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용이 좋아 설득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스타트업 대표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연락하시라”고 조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끈질김에도 지켜야 할 선은 있다. 상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검토는 다 끝나가나요?”, “언제 답을 주실 건가요?”라며 자신의 요구만 반복하는 것은 진심이 아니라 ‘독촉’이다. 기초 체력조차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억지를 부리며 상대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최악의 수다.
하지만 앞선 사례처럼 정중하고 부드러운, 선을 넘지 않는 끈질김은 다르다. 가벼운 안부를 묻거나 상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업계 기사를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관계를 이어가는 방식은 상대에게 ‘정말 열심히 하는구나’, ‘이 일에 진심이구나’, ‘절박하구나’라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협상의 관점에서 이 절박함은 결코 나쁜 신호가 아니다.
거절당해도 남는 자산, ‘심리적 부채감’
협상 테이블에 앉은 이들도 결국 감정을 가진 사람이다. 사람의 내면에는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열심히 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선의가 존재한다. 간절해 보이는 사람의 서류는 한 번이라도 더 꼼꼼히 들여다보게 되고, 조금 더 우호적인 관점에서 평가하게 마련이다.
설령 협상이나 투자가 최종적으로 거절당하더라도 수확은 있다.
얼마 전 겪은 일이다. 몇 년째 우리 회사의 회계감사를 맡고 싶어 꾸준히 영업해 오는 회계법인 파트너가 있었다. 기존 계약 관계로 인해 계속 거절해 왔음에도 그는 잊을 만하면 정중하고 집요하게 문을 두드렸다.
결국 그분과의 미팅이 끝난 뒤 내부 회계 실무자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시는데, 이번에 작은 프로젝트라도 하나 먼저 맡겨보면 어떨까요?”
정중하고 끈질기게 문을 두드렸던 사람에게 거절을 건넬 때 상대의 마음속에는 왠지 모를 ‘미안함’이 남는다. 이 작은 심리적 부채감은 다음 기회가 생겼을 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여는 훌륭한 자산이 된다.
결국 협상은 차가운 계산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논리와 수치로 부족한 1%의 빈틈을 채우는 것은 진심과 절박함을 전달하는 끈질긴 태도에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화기를 들까 말까 주저하며 기다리고 있는 창업가가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연락하길 바란다. 당신의 그 집요한 전화 한 통이 꽉 막힌 협상의 물꼬를 트는 결정적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우준호 대표는 이랜드에서 15년간 M&A와 전략, 사업 운영, 투자를 경험하며 국내외 15건, 누적 약 13억 달러 규모의 인수·매각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현재 M&A·투자유치 전문 자문사 우앤파트너스 대표로 기업의 거래 검토부터 협상과 실행까지 지원하고 있다. 드라마 〈협상의 기술〉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알려졌으며, 실제 M&A 현장에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과 스타트업의 협상 전략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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