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스타트업을 발굴해 투자한다.”
지난 10여 년간 국내 창업 생태계를 움직여 온 액셀러레이터의 역할은 비교적 명확했다. 가능성 있는 창업팀을 선발하고 초기 자금을 지원하며 멘토링과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액셀러레이터는 핵심 인프라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시장 환경은 달라졌다. IPO 시장은 위축됐고 M&A 역시 예전만큼 활발하지 않다. AI와 딥테크 스타트업은 초기부터 기술 검증과 글로벌 진출, 인재 확보, 운영 체계 구축까지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환경에 놓였다. 단순 투자와 멘토링만으로는 창업 성공 확률을 높이기 어려워졌다는 문제의식이 생태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최근 글로벌 창업 생태계가 주목하는 모델이 있다. 바로 ‘벤처 스튜디오(Venture Studio)’다.
지난 5월 27일 서울 성수동 메리히어에서 열린 ‘The New Impact Engine: 한국 시장에서의 벤처 스튜디오 모델 탐색’ 세미나는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임팩트 투자사이자 액셀러레이터인 MYSC는 글로벌 벤처 스튜디오 벤처락(Venturerock), 싱가포르 기반 크로스보더 빌더 윌트벤처스빌더(Wilt Venture Builder)와 함께 한국형 벤처 스튜디오 모델의 가능성을 논의했다.
‘The New Impact Engine: 한국 시장에서의 벤처 스튜디오 모델 탐색’ 세미나 포스터 (자료 제공: MYSC)
투자에서 공동 창업으로…벤처 스튜디오가 던진 질문
이날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단어는 ‘공동 창업(Co-Building)’이었다. 기존 액셀러레이터가 창업팀의 외부 조력자 역할에 머물렀다면, 벤처 스튜디오는 아이디어 검증부터 조직 구축, 사업 개발, 해외 진출까지 직접 참여하며 스타트업과 성장 리스크를 함께 부담하는 구조를 지향한다.
참석자들은 IPO 및 M&A 위축으로 투자 회수 환경이 악화된 상황에서 단순 선별과 소액 투자 중심의 액셀러레이팅 모델만으로는 고도화된 기술 기업의 성장을 뒷받침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특히 AI와 딥테크 스타트업은 창업 초기부터 글로벌 시장 진입 전략과 운영 체계까지 함께 설계해야 하는 만큼, 보다 깊이 관여하는 형태의 창업 지원 모델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벤처락의 플로리스 반 후겐후이제 파트너가 컴퍼니 빌딩 모델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제공: MYSC)
벤처락이 보여준 ‘컴퍼니 빌딩의 시스템화’
이번 세미나에서 주목받은 곳 중 하나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기반의 글로벌 벤처 빌딩 플랫폼 벤처락이었다. 벤처락은 스스로를 ‘벤처 빌딩 및 벤처 투자 플랫폼’으로 정의한다. 단순 투자 기관이 아니라 기술·과학·혁신을 기반으로 차세대 글로벌 기술 기업을 공동 창업(Co-create)하고 성장시키는 모델을 운영하고 있다.
플로리스 반 후겐후이제(Floris van Hoogenhuyze) 파트너는 이날 발표에서 자본 공급 중심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아이디어 단계부터 시리즈A까지의 실행(Execution) 과정을 데이터 기반으로 관리하는 컴퍼니 빌딩 모델을 소개했다.
벤처락은 자체 개발한 운영 체계와 72단계 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트업의 성장 과정을 시스템화하고 있다. 회사 측은 이를 통해 창업 과정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성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본을 단계적으로 투입하는 방식을 강조하고 있다.
벤처락이 소개한 AI 네이티브 운영체제 ‘VerneOS’ 역시 같은 맥락이다. 창업팀의 실행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성과 지표를 기반으로 성장 전략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벤처 스튜디오를 하나의 반복 가능한 시스템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다.
월드벤처스빌더 원대로 대표가 연사로 나와 한국 스타트업의 글로벌 확장을 지원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제공: MYSC)
싱가포르에서 시작하는 글로벌 확장 실험
윌트벤처스빌더가 제시한 방향은 조금 달랐다.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윌트벤처스빌더는 스스로를 ‘Korea-Singapore Cross-Border Venture Studio(한국-싱가포르 크로스보더 벤처 스튜디오)’로 소개한다. 단순한 해외 진출 지원 기관이 아니라 공동 창업(Co-build), 공동 투자(Co-invest), 공동 성장(Co-founder Model)을 기반으로 한국 스타트업의 글로벌 확장을 지원하는 모델을 운영하고 있다.
원대로 대표는 기존의 해외 진출 지원 사업이 단기 프로그램이나 일회성 자문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반면 실제 글로벌 시장 안착에는 현지 법인 설립, 계약 체계 구축, 운영 조직 확보 등 보다 깊은 수준의 실행 지원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윌트벤처스빌더는 이를 위해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합작법인(JV)을 설립하고, 제품 개발부터 투자 유치, 전략 수립, 네트워크 연결까지 함께 수행하는 구조를 운영하고 있다. 홈페이지에는 널담 운영사 조인앤조인과 해녀키친그룹 등이 실제 공동 구축(Co-built) 사례로 소개돼 있다.
특히 조인앤조인(널담)과 해녀키친그룹이 싱가포르 현지에서 JV를 설립하고 시장 안착을 시도한 사례는 행사 참석자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원 대표는 “인큐베이팅에서 액셀러레이팅, 그리고 벤처 스튜디오로 10년 단위로 판이 바뀌고 있다”며 “벤처 스튜디오는 단순 지원 기관이 아니라 창업자와 성패를 함께 책임지는 파트너”라고 설명했다.
AI 시대, 액셀러레이터도 진화할 수 있을까
이번 세미나가 던진 질문은 단순히 새로운 투자 모델의 소개가 아니었다. AI 기술의 확산과 글로벌 경쟁 심화 속에서 액셀러레이터 역시 기존 역할만으로는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었다. 스타트업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점점 복잡해지고 있지만, 기존의 투자·멘토링 중심 지원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벤처 스튜디오가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본 공급을 넘어 창업 과정 자체를 함께 설계하고 실행하는 모델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커지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MYSC는 이번 글로벌 파트너십을 계기로 스타트업과 함께 뛰는 ‘임팩트 엔진’ 역할을 강화할 계획이다. 향후 벤처 스튜디오 전용 펀드 조성과 지역 창업 생태계, 대학, 대기업 오픈이노베이션과 연계한 새로운 모델도 검토하고 있다.
김정태 MYSC 대표는 “글로벌 표준 인프라와 국내 혁신 기술이 결합하면서 생태계 체질 개선의 기회가 열리고 있다”며 “국내 고도화와 글로벌 스케일업을 동시에 달성하는 한국형 벤처 스튜디오 생태계를 구축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때 액셀러레이터가 창업 생태계 혁신의 상징이었다면, 이제는 벤처 스튜디오가 그 다음 실험대에 오르고 있다. 투자 이후를 고민하는 시대, 창업 생태계가 어떤 방식으로 진화할지에 대한 새로운 질문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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