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비스커스를 착즙하고 남은 부산물에서 시작된 실험은 ‘세계 최초 식물성 콜라겐’의 상용화로 이어지며 로가를 시장에 알렸다. 하경수 로가 공동대표는 이 과정에서 농업에서 얻은 천연물이 기술을 만나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로가는 현재 시장 수요를 먼저 파악하고 인공지능(AI)으로 천연물 소재를 설계한 뒤 검증과 생산, 판매까지 연결하는 바이오 플랫폼을 준비하고 있다. 농업 3세대로 자라며 익힌 인내와 대학가 장사의 실패, 11번가와 쿠팡의 신사업에서 쌓은 고객 이해가 지금의 사업 방향을 만들었다.
로가 하경수 대표
두 번의 폐업, 커머스에서 익힌 고객 이해
하 대표는 스무 살 무렵 대학 앞에서 도시락 가게와 치킨 가게를 차례로 운영했다. 두 곳 모두 폐업했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를 직접 실행하고 시장의 반응을 확인하는 일에는 계속 흥미를 느꼈다.
“누군가 짜 놓은 내용을 수동적으로 듣고 외워 시험을 보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고 직접 실행하는 일이 재미있었어요. 대학가 장사는 두 번 모두 망했지만 그때부터 계속 새로운 사업을 시도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 3학년 때에는 SK플래닛 11번가의 오픈마켓 신규 사업 부문에 인턴으로 합류했다. 홈쇼핑에서 오픈마켓으로 커머스 시장의 중심이 이동하던 시기였고, 신규 사업 조직에서 그룹 데이터를 분석하고 서비스를 기획하며 아이디어를 실제 사업에 적용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는 이 경험을 “이미 지어진 건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빈 땅에 새 건물을 함께 짓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6개월 뒤 정규직으로 전환돼 약 2~3년 동안 근무하면서 판매자와 상품, 거래 데이터를 통해 온라인 고객의 구매 방식을 익혔다. 이후 쿠팡의 신사업 부문으로 자리를 옮겨 쌀과 과일, 견과류, 축산물 등 농식품 카테고리를 담당했고, 신선식품과 빠른 배송에 대한 고객의 요구를 확인하며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 판매가 연결되는 구조를 살펴봤다.
퇴사 후에는 지역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새벽 배송하는 ‘파머스라운지’를 준비했다. 새벽배송이 대중화되기 전이었지만 앱 개발과 초기 구축에 자본을 대부분 사용하면서 정식 출시 전에 사업을 접었고, 뒤이어 시계 수리 가격과 장인 정보를 표준화한 애플리케이션 ‘한국시계병원’에도 도전했으나 시장에 정착하지는 못했다. 분야는 달랐지만 두 사업을 거치며 애플리케이션은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1번가와 쿠팡에서 농식품을 구매하는 고객을 분석하고 파머스라운지를 준비하며 농산물 공급과 유통의 문제를 확인한 경험은 그가 다시 농업을 선택하는 계기가 됐다.
“애플리케이션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여러 사업을 거치고 나니 제가 가장 오래 봤고 본질을 이해하고 있는 분야가 농업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어요. 농업이 가진 가치를 소비자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일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경수 로가 대표가 라오스 농장에서 현지 직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로가)
농업 3세대가 라오스에서 발견한 가능성
하 대표가 자신을 농업 3세대라고 설명하는 배경에는 가족의 영향이 있다. 할아버지는 농축산 정책과 생산성 향상에 관여했고, 아버지는 과수원을 운영하며 종자와 재배법, 와사비를 비롯한 새로운 작물을 꾸준히 시험했다. 농업과 가까운 환경에서 자란 그는 자신을 “농사꾼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부모는 자녀의 선택을 통제하지 않았지만 한번 맡은 일은 끝까지 마쳐야 한다는 원칙만큼은 엄격하게 가르쳤다. 어린 시절 넓은 과수원에 반사필름을 깔 때도 작업을 시작하면 해가 지고 작업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날씨와 자연이 결과를 좌우하는 농업의 불확실성은 받아들이되, 사람이 해야 할 몫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아버지가 말한 농사의 공식이 있습니다. 한 번 잘되면 다음에는 잘 안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농사는 날씨와 자연이 결정하는 불확실성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렇다고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덜할 수는 없습니다. 사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세대를 이어 농업을 지켜보며 한편으로는 원물이 가진 가치에 비해 생산자가 얻는 부가가치가 지나치게 낮다고 느꼈다. 많은 양을 생산해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농업의 중요한 역할이었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건강한 삶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답해야 한다고 봤다. 수입 농산물과 가격이나 생산량으로 경쟁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면, 천연물이 지닌 기능을 찾아 기술로 고도화하는 방식으로 농업의 가치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그 문제의식을 품고 2017년 라오스의 유기농 농장에서 히비스커스를 직접 재배했다. 완성된 원료를 외부에서 구매하면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었지만, 원물의 재배 환경과 품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안정적인 바이오 소재를 만들기는 어렵다고 봤다. 재배 단계부터 공급망을 관리하면서 농업과 연구개발을 하나의 과정으로 연결하려는 선택이었다.
“좋은 음식은 재료가 좋아야 합니다. 바이오 소재도 같습니다. 산업의 효율성만 따지면 직접 농사를 짓는 방식이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원물과 공급망을 직접 관리해야 기술과 품질에 대한 주도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게 제 안에 남아 있는 농사꾼의 기질인 것 같습니다.”
식물성 콜라겐의 단서는 히비스커스를 착즙하고 남은 부산물에서 나왔다. 손에 달라붙는 끈적이는 물성을 보며 새로운 성분의 가능성을 떠올리던 중, 종교와 식습관 때문에 동물성 콜라겐을 섭취하지 못한다는 무슬림 지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 건강 소재가 동물성에서 식물성으로 전환되고 있는데 유독 콜라겐만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기 시작했다.
30년 이상 콜라겐을 연구해온 장부식 CTO에게 히비스커스 기반 소재 개발을 제안한 뒤 2년간 연구를 이어갔고, 2019년 식물성 소재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2021년에는 제조 기술과 원물에 관한 특허를 확보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히비스커스 유래 식물성 콜라겐 펩타이드 ‘VC-H1’을 상용화했다. VC-H1은 2022년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식품박람회 시알 파리(SIAL Paris)에서 국내 기업 최초로 원료 부문 그랑프리(대상)을 받았다.
히비스커스에서 얻은 성과는 연구 대상을 당근과 참깨, 인삼, 카놀라 등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각각의 천연물에 들어 있는 유효 성분을 찾아내고 펩타이드로 고도화하면서 식물성 콜라겐을 개발한 기술이 다른 소재에서도 통하는지 검증해왔다.
“로가가 식물성 콜라겐 회사로 출발한 것은 맞지만 그게 최종 목적지는 아닙니다. 히비스커스에서 확인한 기술을 다른 천연물에 적용하고, 각 소재에서 더 신뢰도 높은 유효 성분을 찾아내는 것이 지금의 로가입니다.”
라오스 유기농 농장에서 수확한 히비스커스. 로가는 재배 단계부터 공급망을 관리하며 이를 식물성 콜라겐 펩타이드 ‘VC-H1’ 등 천연물 기반 바이오 소재로 개발하고 있다. (사진 제공: 로가)
시장부터 읽고 소재를 만드는 ‘바이오파운드라’
식물성 콜라겐으로 기술과 시장성을 확인한 로가는 2025년 매출 300억원을 돌파했고, 2026년 5월에는 KB인베스트먼트로부터 155억원 규모의 시리즈B 투자를 유치했다. 청주 제1공장에 이어 세종에 제2공장을 건설하며 천연물 소재의 발굴과 검증, 생산, 사업화를 한 흐름으로 연결할 기반도 마련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축적한 연구개발과 생산 역량은 AI 기반 신소재 개발 플랫폼 ‘바이오파운드라(BioFoundra)’로 이어졌다. 기존 기능성 소재 산업에서는 연구자가 새로운 원료나 효능을 발견한 뒤 시장성을 확인하는 경우가 많아,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개발을 마치고도 소비자 수요나 가격, 생산 조건이 맞지 않아 제품화에 실패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바이오파운드라는 소비자의 관심과 구매 행동, 국가별 시장 규모, 경쟁 제품 현황을 분석해 어떤 시장에서 어떤 기능이 필요한지부터 찾아낸다. 수요가 확인되면 AI가 적합한 천연물과 펩타이드 후보를 탐색하고, 실험에 들어가기 전에 분자구조와 효능 가능성을 가상 환경에서 검토한다. 시장성이 부족하거나 개발 성공 가능성이 낮은 후보를 초기에 걸러내 연구개발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구조다.
“지금까지는 연구실에서 좋은 소재를 만든 뒤 시장에 내놓고 소비자를 찾는 방식이 많았습니다. 저희는 시장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기능을 먼저 확인하고 그 수요에 맞는 천연물 소재를 개발하려고 합니다. 소재 개발의 출발점을 기술이 아니라 고객에게 두는 것입니다.”
소재와 사람의 궁합을 살피는 과정에는 로가의 사외이사로 합류한 윤사중 교수의 유전체 기반 디지털 트윈 기술 ‘닥터트윈AI(Dr. Twin AI)’가 활용된다. 같은 성분을 섭취해도 개인마다 나타나는 반응이 다른 만큼 특정 소재의 반응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집단과 낮은 집단을 구분하고, 개발 단계부터 적합한 소비자군을 정밀하게 설정하려는 시도다.
디지털 환경에서 선별한 후보는 로가의 연구실과 생산시설로 넘어가 실제 소재로 구현된다. 시제품 제작과 생산 공정 개발을 거쳐 품질을 표준화하고 인체적용시험과 상업 생산, 글로벌 판매까지 이어간다. AI가 제안한 가능성을 분석 결과로 남겨두지 않고 제품과 매출로 전환할 수 있는 연구·생산 체계를 갖췄다는 점이 바이오파운드라의 핵심 경쟁력이다.
청주 제1공장과 건설 중인 세종 제2공장을 중심으로 외부 생산 파트너 네트워크도 플랫폼에 연결할 예정이다. 초기 시장 반응을 확인하기 위한 소량 생산부터 판매 증가에 대응하는 대량 생산까지 고객사의 성장 단계에 맞춰 지원하고, 생산만 필요한 기업에는 위탁생산을, 새로운 소재와 공정 개발이 필요한 기업에는 공동개발과 위탁개발생산(CDMO)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하경수 로가 대표가 2025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데모데이(Demo Day)에서 로가의 기술과 사업 계획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제공: 로가)
작은 브랜드에 ‘자신만의 연구실’을
식품과 화장품 시장에는 분명한 철학과 콘셉트를 가진 작은 브랜드가 많지만, 자체 연구소를 운영하고 독자적인 원료를 개발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자본과 전문인력이 부족한 브랜드는 제조사가 이미 보유한 원료와 처방을 선택한 뒤 패키지와 마케팅으로 차이를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 대표는 이런 구조에서 브랜드가 제품 개발의 주도권을 잃는다고 봤다. 소비자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며 시장의 요구를 잘 아는 브랜드가 정작 자신이 원하는 원료를 실험하고 개발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아무리 작은 브랜드도 자신만의 콘셉트와 원료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R&D는 대기업의 전유물에 가까웠어요. 자체 연구소가 없는 브랜드에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원료를 개발할 수 있는 연구실을 제공하고 싶습니다.”
바이오파운드라를 이용하는 브랜드가 목표 고객과 필요한 기능을 제시하면 AI 분석과 로가의 연구진, 생산시설이 연결돼 브랜드에 맞는 원료를 개발한다. 완성된 소재는 해당 브랜드의 제품에 적용할 수 있고, 다른 기업에 공급하거나 라이선싱하는 방식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제품 판매에 집중됐던 수익구조에 원료와 지식재산권이라는 새로운 자산을 더할 수 있는 셈이다.
플랫폼을 통해 소재와 제품이 시장에 출시되면 판매 과정에서 얻은 데이터가 다음 연구에 다시 반영된다. 어떤 수요가 실제 구매로 이어졌는지, 어떤 후보물질이 실험과 생산 단계에서 높은 가능성을 보였는지, 인체적용시험과 판매 현장에서는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를 축적하면서 다음 소재를 찾고 사업화하는 정확도를 높여간다.
로가는 바이오파운드라를 CES 2027 혁신상에 출품하고 B2B 시장에서 AI 신소재 개발과 CDMO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기업 고객과 함께 기술과 생산 경험을 쌓은 뒤에는 소재 라이선싱과 글로벌 원료 유통으로 수익모델을 다각화하고, 장기적으로 개별 소비자가 자신의 몸에 필요한 천연물 소재를 알고 선택할 수 있는 개인 맞춤형 플랫폼까지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지금은 기술과 생산 능력, 신뢰를 더 쌓아야 하므로 B2B 고객부터 지원하고 있습니다. 작은 브랜드가 자체 R&D를 주도할 수 있도록 돕고, 그 과정에서 축적한 기술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에서 소비자에게 직접 다가갈 계획입니다.”
원물 재배부터 연구와 생산까지 직접 연결해 농업의 가치를 바이오 소재로 확장하려는 로가의 출발점이다. (사진 제공: 로가)
“로가 덕분에 조금 더 잘 살았다”는 말을 듣는 회사
식물성 콜라겐에서 바이오파운드라까지 사업의 범위는 커졌지만 하 대표가 중요하게 보는 기준은 고객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가에 있다. 건강기능식품과 화장품은 여러 단계의 제조와 유통, 마케팅을 거쳐 판매되기 때문에 소비자가 실제로 어떤 성분이 들어 있고 자신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에서다.
로가는 천연물에서 유효 성분을 찾아내는 원료 기업으로서 성분과 효능에 관한 정보를 소비자에게 정확하게 제공하고, 개인이 자신의 몸에 필요한 소재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한다. 기업 고객을 위한 연구개발 플랫폼에서 출발해 장기적으로 개인 맞춤형 서비스까지 연결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로가가 식물성 콜라겐 회사로 출발한 것은 맞지만 궁극적으로는 개인이 자신에게 필요한 성분을 알고 선택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회사가 좋다고 주장하는 제품보다 본인에게 맞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큰 목표를 실행하려면 기술만큼 사람의 신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투자자와 연구자, 임직원에게 사업의 방향을 과장해 설명하기보다 왜 이 일을 시작했으며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는지 꾸준히 공유하고, 연구개발과 생산시설 투자로 약속을 증명해왔다.
“미션이 거짓으로 느껴지면 유능한 인재는 물론이고 고객 한 명도 데려올 수 없습니다. 신뢰는 짧은 말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래 지켜보는 과정에서 생깁니다. 그래서 제가 왜 이 일을 하는지 계속 이야기하고, 말한 것을 행동으로 지키려고 합니다.”
하 대표가 기업의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에는 매출과 기업가치뿐 아니라 고객의 삶에 남긴 변화도 포함된다. 로가의 기술과 제품을 통해 한 사람이 자신의 건강을 더 잘 이해하고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기업의 역할이다.
“한 사람의 고객이 인생을 마칠 때 ‘로가 덕분에 조금 더 잘 살았다’고 말해줬으면 합니다. 제가 만들고 싶은 회사와 브랜드는 결국 그 감정을 남기는 곳입니다. 기업이 왜 태어났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며, 세상에 무엇을 기여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야 오래 생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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