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청정기에서 필터는 너무 당연한 존재였다. 공기 중 먼지를 걸러내고, 오염된 필터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새것으로 교체하는 방식이 오랫동안 공기를 관리하는 표준으로 자리 잡아왔다. 워터베이션 정윤영 대표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 익숙함이었다. 더 좋은 필터를 만드는 대신 공기를 깨끗하게 만드는 데 꼭 필터가 필요한지, 먼지를 필터 안에 계속 모아두는 방식부터 다시 살펴봤다.
그 질문에서 출발한 워터베이션은 물을 기반으로 공기정화 기술을 개발하는 에어테크(Air Tech) 스타트업이다. 대표 제품 큐(CUE) 에어워셔는 필터에 오염물질을 쌓아두는 대신 물로 포집한 뒤 오염된 물을 버리고 새 물을 채우는 방식으로 공기를 관리한다. 비가 내린 뒤 공기가 맑아지는 자연의 원리를 제품 안으로 가져왔다.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었지만 시장의 반응은 예상보다 빨랐다. 워터베이션은 국내 출시에 앞서 미국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킥스타터를 통해 해외 시장에서 먼저 가능성을 확인했고, 약 54만 달러(약 7억 원)의 펀딩을 기록했다. 필터를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대신 물을 갈아 공기를 관리한다는 새로운 방식에 글로벌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었다.
워터베이션 정윤영 대표
더 좋은 필터가 아닌 새로운 방식을 찾다
워터베이션의 출발점에는 정윤영 대표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가족들의 일터가 있었다. 음식점을 운영하거나 무대 설치 현장에서 일하는 가족들을 통해 기름과 먼지, 분진이 많은 환경을 자연스럽게 접했고, 그 과정에서 공기 환경이 나쁠수록 필터가 빠르게 오염돼 교체와 관리 부담까지 커졌다. 공기를 깨끗하게 하기 위한 필터가 정작 오염이 심한 곳일수록 더 자주 버려지는 구조는 기존 공기청정 방식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공기가 좋지 않은 환경일수록 필터 관리가 더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지를 계속 필터 안에 쌓아두기보다 비가 공기를 씻어내듯 물로 관리할 수는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더 좋은 필터를 만드는 대신 먼지를 처리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보자는 발상이었다. 비가 내린 뒤 공기가 맑아지듯 물로 오염물질을 포집하고, 더러워진 물을 버린 뒤 깨끗한 물을 다시 채우면 필터를 계속 교체하지 않고도 공기를 관리할 수 있다. 자연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이 현상을 공기정화 기술로 구현한 것이 WVG(Water Volume Grid, 물 분사형 워터네크 공법)다. WVG는 작은 에너지로 물을 균일한 미세 입자로 분사하고, 물 입자의 크기와 분사 방식부터 공기의 흐름과 접촉 시간까지 설계해 공기 중 오염물질을 효과적으로 포집하는 기술이다. 기존 필터가 오염물질을 내부에 붙잡아두는 것과 달리, WVG를 적용한 큐(CUE) 에어워셔는 공기와 충분히 접촉한 물이 먼지를 포집해 물속으로 옮긴 뒤 오염된 물과 함께 배출한다.
사용자는 오염물질이 담긴 물을 버리고 깨끗한 물을 다시 채우는 것으로 제품을 관리할 수 있으며, 투명한 구조를 통해 물과 공기의 움직임부터 오염된 물이 배출되는 과정까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오염물질을 물로 포집하면서 필터를 교체하는 대신 물을 갈아주는 방식으로 공기 관리의 방법도 달라졌다.
“기술의 핵심은 작은 힘으로도 물을 안정적으로 미세 분사하는 것입니다. 물과 공기가 충분히 만나도록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
다만 아이디어를 실제 제품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는 물을 미세하게 분사하는 기술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안정적인 분사와 함께 누수와 소음, 소비전력까지 동시에 해결해야 했고, 기존 제품의 일부 사양을 변경하는 일반적인 OEM 방식으로는 이를 구현하기 어려웠다. 워터베이션이 국내 제조를 선택해 직접 제조 노하우를 쌓은 배경으로, 수백 번의 시제품 제작과 수차례 구조 변경을 거쳐 현재의 WVG 기술을 완성했다.
워터베이션의 물 기반 공기정화 기술 적용 모델. 왼쪽부터 실내형 공기 세척기와 산업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산업형 공기정화 모델
필터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지를 넓히다
헤파(HEPA) 필터와 워터베이션의 물 기반 공기정화 기술은 사용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강점을 갖는다. 높은 수준의 입자 제거 효율이 필요한 공간에서는 헤파필터가 강점을 발휘하고, 물 기반 방식은 필터를 주기적으로 교체하거나 폐기하지 않고 물을 갈아주는 방식으로 관리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워터베이션 역시 연구를 거듭하면서 두 기술을 경쟁 관계로 보기보다 각각의 쓰임에 맞는 공기 관리 방식으로 구분했다.
“헤파필터가 반드시 필요한 공간이 있습니다. 워터베이션은 기존 기술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물을 활용한 또 하나의 공기 관리 방식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큐(CUE) 에어워셔를 ‘필터 없는 공기청정기’보다 ‘공기 세척기’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존 공기청정기와 성능을 비교해 필터를 대체하기보다, 물로 공기를 씻고 오염된 물을 버려 관리하는 별도의 제품군으로 시장에 접근한다. 사용 환경에 따라 적합한 공기 관리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나의 선택지를 더한 셈이다.
이러한 특성은 기름과 분진이 많이 발생하는 산업 현장에서 수요로 나타났다. 큐(CUE) 에어워셔는 당초 일반 가정을 주요 시장으로 개발했지만, 전시회에서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인 곳은 오히려 공장과 제조시설이었다. 오염이 심할수록 필터 교체 주기가 짧아지고 유지관리 부담도 커지는 만큼 물을 교체하는 방식에 대한 현장의 요구가 컸다.
워터베이션은 이를 계기로 WVG 기술을 가정용 공기청정기에서 산업용 공기정화 설비와 주방 후드, 공조(HVAC) 시스템, 스마트빌딩, 반도체용 집진장치 등으로 적용하기 시작했다. 완제품 한 대를 판매하는 제조사에서 물 기반 공기정화 기술을 다양한 환경에 공급하는 기술 기업으로 사업의 무게중심도 옮겨가고 있다.
워터베이션 정윤영 대표
킥스타터에서 확인한 ‘물로 씻는 공기’의 가능성
가정용으로 개발한 큐(CUE) 에어워셔는 국내보다 해외 시장에 먼저 선보였다. 워터베이션은 필터 대신 물로 공기를 씻는 방식이 해외 소비자에게 실제 구매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국내 출시에 앞서 미국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킥스타터를 선택했다. 기술에 대한 자신감은 있었지만 새로운 공기 관리 방식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별개의 문제였다.
“기술에 대한 자신감은 있었지만 시장의 반응까지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지도 없는 한국 스타트업 제품을 해외 소비자가 온라인에서 선뜻 구매할지, 필터 대신 물로 공기를 씻는 새로운 개념을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일지 내부적으로도 긴장감이 컸습니다.”
킥스타터 펀딩 규모는 약 54만 달러, 한화로 약 7억 원을 기록했다. 워터베이션은 펀딩 금액보다 소비자들이 ‘필터 없는 공기 관리’라는 새로운 개념에 실제 구매로 반응했다는 점에 의미를 둔다. 필터 교체 비용과 폐기물을 줄이고 공기정화와 습도 관리를 함께 할 수 있다는 점도 후원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회사는 이들을 새로운 공기 관리 방식을 함께 검증한 첫 사용자로 보고 있다.
워터베이션은 오는 9월 큐(CUE) 에어워셔를 국내에 출시한다. 안정적인 제품 공급을 위한 자체 생산라인 구축을 준비하는 한편, 가정용 시장에서 기업과 공공 영역까지 물 기반 공기정화 솔루션의 적용처를 확대할 계획이다.
글로벌 검증 넘어 국내로…필터 폐기물까지 줄이는 공기 관리
기업과 공공 영역으로 적용 범위가 확대되면서 필터 폐기물을 줄이는 효과도 중요해졌다. ESG 경영과 폐기물 감축의 중요성이 커지는 가운데, 워터베이션은 공기를 정화하는 과정에서 필터 교체와 폐기로 발생하는 부담까지 줄이고 그 효과를 데이터로 축적하는 작업도 준비 중이다.
“얼마나 많은 필터를 줄였고, 그 결과 어떤 환경적 효과를 만들었는지를 데이터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단순히 공기를 깨끗하게 만드는 제품을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과 공공기관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공기를 관리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를 만들고 싶습니다.”
가족의 일터에서 기름과 먼지, 분진을 가까이에서 접하며 시작된 고민은 가정용 큐(CUE) 에어워셔 개발을 거쳐 산업 현장과 공조 시스템, 기업과 공공기관으로 이어졌다. 제품이 쓰이는 환경은 달라졌지만 처음 던진 질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공기 중 오염물질을 얼마나 잘 걸러내느냐에 더해, 그렇게 걸러낸 먼지를 어떻게 처리하고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워터베이션은 그 답을 필터에 먼지를 모아두고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대신 오염물질을 물로 포집한 뒤 씻어내는 방식에서 찾았다. ‘더 좋은 필터’를 만드는 데 집중하기보다 ‘공기를 꼭 필터로 관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기술은 이제 가정용 제품과 산업용 설비, 공조 시스템 등 서로 다른 환경에서 활용된다. 공기를 깨끗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필터 사용과 폐기물까지 줄이며 공기 관리에 또 하나의 선택지를 더하는 것, 워터베이션이 물에서 찾은 해답이다.
* 스타트업 생태계 기자단은 KAIA와 벤처스퀘어가 함께 운영하며 스타트업 현장의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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