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은 빠르게 늘어나는데 정작 회사 안에서는 돈이 어디서 벌리고 어디에 묶여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주문이 밀려들어도 납기를 확답하지 못하고, 사업 규모가 커질수록 관리 인력과 수작업까지 늘어난다. 성장하는 중소·중견기업이 겪는 문제는 새로운 고객을 확보하는 일만큼이나 복잡해진 내부 운영을 감당하는 데 있다. SAP코리아가 이러한 성장의 병목을 해결하기 위해 국내 유망기업 100곳의 디지털 전환과 인공지능(AI) 활용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내놨다.
SAP코리아는 20일 서울 여의도 IFC 더 포럼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중소·중견 성장기업 지원 프로그램 ‘SAP NEXT 100’의 추진 배경과 운영 방안을 공개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김준영 SAP코리아 부사장의 환영사에 이어 강지훈 중견·중소기업 고객 사업부문장이 프로그램을 소개했으며, 하나은행과 PwC코리아, ASPN, 블루어드 관계자들이 참여한 패널토의에서 실제 기업들이 겪는 시스템 도입과 운영 문제를 논의했다.
김준영 SAP코리아 부사장이 20일 서울 여의도 IFC 더 포럼에서 열린 ‘SAP NEXT 100’ 기자간담회에서 국내 중소·중견 성장기업 지원 프로그램의 추진 배경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제공: SAP코리아)
SAP가 제시한 해법은 기업이 충분히 성장한 뒤 복잡해진 시스템을 다시 구축하는 대신, 성장 초기부터 경영·업무·데이터를 연결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도록 돕는 것이다. 이를 위해 SAP의 클라우드 전사적자원관리(ERP) 기술에 금융, 결제, 컨설팅, 구축·운영 분야의 전문성을 결합했다.
김준영 SAP코리아 부사장은 빠르게 성장하는 국내 기업들을 지켜보며 초기 디지털 기반이 이후의 성장 속도와 경쟁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고 소개했다. 혁신적인 기술과 매출 성과를 확보하고도 관리 체계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해 투자 유치나 기업공개(IPO), 해외 진출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기업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 부사장은 “이러한 과제는 SAP 혼자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해 금융과 결제, 컨설팅까지 각 분야의 대표 파트너들과 함께 SAP NEXT 100을 마련했다”며 기업의 디지털 전환과 AI 혁신을 함께 준비하는 사업 파트너가 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성장한 뒤 고치면 더 비싸다…월 결산 14일에서 시작된 문제
이날 발표에서 강지훈 부문장은 자신이 약 10년 전 만났던 한 성장기업의 사례를 꺼냈다. 창업 초기 ERP 도입을 상담하던 기업에 비용 부담을 고려해 비교적 저렴한 시스템을 먼저 사용하도록 권했지만, 몇 년 뒤 다시 만난 기업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프로젝트별 수익을 제때 확인하기 어려워졌고 월 결산에는 약 14일이 걸렸다. 경영진이 실적을 물을 때마다 직원들이 수작업으로 자료를 취합하다 보니 수치가 일치하지 않는 일도 발생했다. 사업모델이 바뀔 때마다 정산 시스템을 수정해야 했고, 처음에는 간단해 보였던 개발 프로젝트가 장기화됐다.
강 부문장은 당시 기업이 성장한 뒤 시스템을 정비하는 데 드는 비용이 처음 예상했던 수준보다 크게 늘어났다고 회고했다. 단순한 소프트웨어 교체를 넘어 이미 복잡해진 업무 절차와 조직의 일하는 방식까지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강지훈 SAP코리아 중견·중소기업 고객 사업부문장이 ‘SAP NEXT 100’의 단계별 지원 구조와 성장기업의 ERP 도입 과제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제공: SAP코리아)
문제의 핵심은 직원 개인의 역량보다 회사 전체의 업무와 데이터가 서로 분리돼 있다는 데 있었다. 구매팀은 단종 예정 제품의 자재를 계속 발주하고, 재고에는 현금이 묶여 있지만 경영진은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매출이 증가해도 수익성과 현금흐름을 함께 관리하기 어렵다.
강 부문장은 기업들이 ERP 도입의 필요성을 몰라서 미루는 것이 아니라 당장 제품 개발과 채용, 영업에 투자해야 하는 상황에서 시스템 구축에 필요한 자금과 전문인력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SAP가 기존에 전문 컨설턴트와 운영 인력을 양성하는 데 투자해 왔다면, 이번에는 앞으로 성장할 기업을 조기에 발굴해 운영 기반을 갖추도록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SAP NEXT 100은 총 100개 성장기업을 대상으로 약 8개월간 진행되는 단계별 프로그램이다. 첫 1개월에는 경영·업무·데이터의 병목을 진단하고, 다음 1개월에는 글로벌 표준 프로세스와 AI 활용 로드맵을 설계한다. 이후 4개월 동안 SAP 클라우드 ERP를 단계적으로 구축한 뒤 2개월간 교육과 운영 안정화, 고도화를 지원하는 구조다. 실제 기간은 기업별 구축 범위와 난이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선정 기업에는 디지털 전환 로드맵, 비즈니스 AI 준비도, 성장 혁신 컨설팅으로 구성된 총 2,500만원 상당의 전문 진단 서비스가 무상 제공된다. SAP 특별 라이선스 조건과 파트너사의 표준 구축 패키지, 금융 연계 혜택을 적용하면 초기 도입 부담을 최대 약 50%까지 낮출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지원 규모와 할인율은 선정 결과 및 개별 계약 조건에 따라 달라지며 모든 기업에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핵심 재무 영역을 대상으로 한 12주 표준 구축 옵션도 마련했다. 기업이 처음부터 모든 업무 시스템을 교체하기보다 필요한 기능부터 적용하고, 사업 확장에 맞춰 물류와 생산 등으로 범위를 넓힐 수 있도록 한 방식이다.
SAP코리아와 파트너사 관계자들이 ‘SAP NEXT 100’ 기자간담회에서 클라우드 ERP 도입, 금융 연계, AI 활용 및 기업 내부의 변화 관리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 제공: SAP코리아)
“ERP를 AI로 직접 만들면 안 되나”…현장에서 나온 질문
이번 간담회에서 눈길을 끈 대목은 ERP 구축에 필요한 비용과 기간뿐 아니라 AI가 기업용 소프트웨어의 역할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관한 논의였다.
AI 에이전트로 필요한 업무 기능을 직접 개발할 수 있는 시대에 기존 ERP를 도입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천석범 블루어드 본부장은 개발 과정에서 뒤따르는 데이터 관리와 내부 통제 문제를 짚었다.
천 본부장은 기업이 필요한 기능만 개발하려고 시작했다가 데이터 접근 권한과 외부 공유 범위, 데이터 플랫폼 구성까지 검토해야 하는 상황을 경험한다고 소개했다. 개별 기능을 빠르게 만드는 것과 기업 전체가 신뢰할 수 있는 업무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취지다.
회계와 자금 관리에 사용되는 데이터는 정확성이 중요하다. 천 본부장은 SAP의 AI 기능 도입 속도가 상대적으로 신중한 이유 역시 기업용 시스템에서 숫자 하나의 오류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과 관련이 있다고 봤다. AI로 개발한 기능을 기존 ERP 기반 위에 결합하되, 기업의 데이터 관리 원칙과 내부 통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기술이 발전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강 부문장도 AI 활용에 앞서 기업 내부의 표준화된 업무와 데이터 기반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여러 AI 프로젝트를 시도한 기업들이 다시 ERP를 검토하는 이유로 축적된 산업별 업무 프로세스, 검증된 내부 통제 체계, 정확한 마스터 데이터를 꼽았다.
실제 기업 현장에서 AI를 적용할 수 있는 업무는 구체적이다. ASPN 이성훈 상무는 회사의 비용 처리 규정을 반영한 전표 작성과 재고 불일치 검증, 매출·비용 예측 등을 예로 들었다. 사람이 일일이 규정을 확인하고 자료를 대조하는 업무를 AI가 보조하면 결산과 관리에 투입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시스템 구축이 끝났다고 업무 혁신까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PwC코리아 천재문 상무는 국내 기업들이 기존 업무 관행에 맞춰 시스템을 개별 개발하는 방식에 익숙하다는 점을 언급하며, 클라우드 ERP 도입에서는 표준 프로세스를 받아들이는 조직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천 상무는 특히 경영진의 참여와 현업 직원들의 적응을 주요 과제로 꼽았다. 충분한 변화 관리 없이 시스템을 개통하면 전문인력이 부족한 중소·중견기업에서는 실제 활용이 중단될 수 있어 구축 전후의 교육과 업무 방식 개선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컨설팅·구축사가 한 팀으로…100개 기업의 성장 기반 지원
SAP NEXT 100에는 SAP코리아를 비롯해 하나은행, 비자 코리아, PwC코리아, ASPN, 블루어드가 참여한다. SAP가 클라우드 ERP와 비즈니스 AI, 라이선스 지원을 담당하고 각 파트너사가 금융·결제·컨설팅·시스템 구축 분야에서 역할을 나눠 맡는다.
하나은행은 SAP 비즈니스 테크놀로지 플랫폼(BTP)과 연계한 펌뱅킹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존에 구축된 연계 서비스를 활용하면 기업이 별도의 금융 시스템을 처음부터 개발하는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박태준 하나은행 기업플랫폼본부장은 기업이 성장하면서 지사와 관계사, 해외 자회사가 늘어나더라도 자금 관리와 내부 통제를 담당하는 인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ERP와 연동된 펌뱅킹을 활용하면 적은 인원으로도 관계사 자금을 관리하고, 투자 유치나 IPO 준비 과정에서 요구되는 회계·재무 정보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PwC코리아는 대기업 프로젝트에서 축적한 산업별 업무 혁신 경험을 중소·중견기업에 적용한다. 사전 진단과 표준 템플릿, ‘Grow Fast’ 방법론을 활용해 기업의 성장 단계에 맞는 업무 프로세스를 설계하고 구축 기간과 비용을 줄이는 역할이다.
ASPN은 20년 이상 축적한 ERP 컨설팅·구축 경험을 기반으로 기업별 일정과 예산을 진단하고, 재무 관리에서 생산·물류 영역까지 단계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을 지원한다. AI를 활용한 반복 업무 자동화와 데이터 검증도 주요 지원 영역이다.
블루어드는 클라우드 ERP 구축과 운영, 자금관리 솔루션, AI 에이전트 연계를 담당한다. 기업이 새로운 AI 기능을 도입하면서도 기존 업무 데이터의 정확성과 관리 체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구상이다. 비자 코리아는 법인카드 도입·전환과 연계한 결제 분야 지원에 참여하며, 구체적인 혜택은 별도로 안내될 예정이다.
[사진자료2] SAP NEXT 100 하반기 1차 모집 안내이처럼 여러 기관이 함께 참여하는 구조는 기업이 ERP 도입 과정에서 컨설팅과 구축, 금융 연계 서비스를 각각 검토해야 했던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SAP코리아는 초기 진단부터 실제 구축과 운영 안정화까지 연결해 기업이 디지털 전환 프로젝트를 중도에 멈추지 않도록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지원 대상은 NICE평가정보 기준 중소·중견기업 가운데 SAP 퍼블릭 클라우드 ERP 도입을 희망하는 기업이다. 현재 매출이나 기업 규모뿐 아니라 향후 3~5년간의 성장 계획과 경영진의 실행 의지를 주요하게 평가한다.
선정 기준은 성장 가능성 30%, 혁신 필요성 30%, 표준 적합성 30%, 실행 가능성 10%다. 온라인 신청 이후 적합성 평가와 사전 인터뷰를 거쳐 약 4주 안에 최종 선정하며, 선정 이후 사업 착수까지는 약 4주가 소요될 수 있다.
1차 모집은 오는 10월 31일까지 진행된다. 2차 모집은 11월부터, 3차 모집은 2027년 2분기에 진행할 예정이다.
SAP코리아가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확보하려는 것은 100개 기업의 ERP 도입 실적만은 아니다. 초기 비용과 전문인력 부족으로 시스템 정비를 미뤄 온 기업들이 실제 업무를 바꾸고, 이후 매출 확대와 해외 진출 과정에서도 운영 체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과제다. 강 부문장이 발표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성장하기 전에 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여기에 있다. 100개 기업의 선정과 시스템 구축을 넘어, 이들이 성장 과정에서 겪는 비용과 업무의 병목을 얼마나 줄일 수 있을지가 SAP NEXT 100의 성과를 가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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